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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Dec 09. 2023

편안하우꽈?


인생에서 가끔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탐라광장에서 돌길을 걷다 무작정 들어간 전시회장의 이름은 산지천갤러리였다. 산지천山地川은 한라산 자락에서 출발해 동문시장과 탐라광장을 통과해 바다로 흐르는 개천의 이름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돌길에 무심히 꽂혀있는 팻말 때문이었다.

편안하우꽈?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길 한복판에서 받았고 나는 멈추어 섰다. 편안한가. 제목이 어린 여성과 중년 남성의 로맨스물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드라마에서 어린 여주인공의 이름도 비슷했다.

지안至安

드라마는 중년 남성이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라고 묻고, 어린 여성이 네, 네, 하고 대답하며 막을 내린다. 굉장히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고 마지막 화가 끝나고 며칠을 테마곡을 들으며 보냈었다. 편안함에 이르렀나.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개체에게 적용되는 질문이기도 했다. 팻말을 찍기 위해 몇 발자국 물러나 바닥에 앉았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팻말 뒤 건물의 절반을 덮은 대형 포스터였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채워진 포스터에는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몰입immersion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끌리듯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전시는 제주 출신 故김수남 사진작가의 인생을 조망한 사진전이었다. 사실, 그가 누군지 몰랐는데 무료관람이 아니었다면 도로 나왔을 것이다.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먼저 벽면에 상영되고 있는 영상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큰 등치에 배가 나온 중년 남성이 환히 웃고 있었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아저씨였다.

이빨이 좀 듬성듬성했잖아요. 친구들이 놀려주느라고 강냉이라고 그랬대요.

조용한 전시장 안에 내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강냉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실제 작가의 앞니 두 개와 송곳니 두 개 사이에는 간격이 눈에 띄게 벌어져 있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남편의 별명을 전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작가와 빼닮아있었다. 이어서 아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집에 왜 이렇게 귀신 사진 같은 게 많냐 물어봤죠. 이게 아름답고 멋있어 보이면 어른이 된 걸 거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김수남은 자연을 보존하는 것처럼 인간의 무속 문화 또한 지키고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무속 관련 사진을 찍었고 2006년 촬영차 방문한 치앙라이에서 작고했다. 그의 가족은 그가 찍은 사진을 모두 갤러리에 기증했다. 가족은 그와 그의 작업을 존중했고 그의 유산이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사진보다도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유품이었다. 해지고 낡아 떨어져 나간 사진가방과 휘갈겨 쓴 취재수첩, 카메라, 휴대용 술병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촬영 전에는 노트에 촬영 계획을 빼곡히 적었고, 촬영할 때는 목에 네다섯 대의 카메라를 걸고 그때그때 펼쳐지는 장면에 따라 재빨리 적절한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고 다. 그가 쓴 수첩의 내용을 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는 지렁이가 기어 다닐 정도로 심한 악필이었는데 아마도 오랜 취재 생활로 인해 글자체가 무너졌을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빠르게 적어내야 하는 기자의 습관이라고나 할까.

서울의 가족이 생각난다. 늘 정초에 없고 아빠 때문에 외로움과 서글픔을 갖고 있는 상훈제훈 희영, 미안하다. 느낌만으로는 안되지만 서울에 돌아가면 술좀 덜 마시고 가족을 위해야지.

오로지 사진에 전념했던 작가에게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 부채감은 필연적이다. 또 다른 수첩에다 대고 고개를 숙였다. 사진가의 길이란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사진가들은 몇일 몇주 몇달을 전쟁터 혹은 정글에서 악조건과 고독과 싸우면서 일한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돈. 아니다. 집에서 광고사진을 찍으며 더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명예일까. 결국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고방식. 창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전문가들은 오직 외길. 할 수 있는 옳은 길, 완벽을 추구하는 길, 어려운 길을 걸어간다. 그것은 창조적인 인간은 미래를 위해 뛰도록 항상 찾고 바라고 믿고 의식하고 있던 잠재의식적이던 미래는 좀더 낳은 날이 될것이라고 믿으며 그의 몫을 공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요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것을 모른다. 그러나 진짜는 알아볼 수 있다.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그럴싸한 문장과 거칠고 투박하지만 진을 담은 문장은 구분할 수 있다. 진짜는 고개를 숙이게 한다. 다시 한번 머리를 숙이고 읽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고.

창조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좀 더 나은 미래에 공헌하는 일.

낮에 b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넌 글을 써야 하는 애야.

나에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와 쓰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기여할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유품, 취재수첩

*취재수첩 인용문은 띄어쓰기 및 맞춤법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자료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DhnIvRdP5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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