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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Dec 02. 2023

보통 사람들


제주시에 들어오자 확실히 요즘 건물이 눈에 많이 띄었다. 요즘 건물이라 하면 지어진 지 20년, 30년 정도 되는 비슷한 스타일의 멋없는 사각형 건물을 뜻했다. 투자 대비 이익을 생각하는 부동산 주인과 건설사들은 전 국토의 건물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새로 생긴 세종시조차 특색 없이 닮아있는 건물이 늘어선 것을 보고 괜스레 가슴이 먹먹했었다. 나에게 돈이 있다면 저렇게 짓지 않을 텐데. 나만의 취향과 감성이 담긴 지구상에 하나뿐인 집을 지을 텐데. 안타깝게도 내겐 돈이 없었다.

아직도 이런 건물이 있나.

요즘 건물 사이에 오래된 목조 건물이 나왔다. 언뜻 보기에 낡아 떨어져 나간 것 같기도 했다. 2층 건물이었는데 보수를 했는지 1층 외관에 어두운 색상의 벽돌을 쌓았고 검은 글씨로 SOONA라고 적혀 있었다. 수나? 이곳은 카페였다.

갈색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외로 깔끔하고 독특하면서 개성 넘치는 공간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개성 넘쳐 보이는 숏컷의 중년 여성이 당찬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서 메뉴판을 보는데 카페 주인이 대뜸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데 그런 모자 서울에서도 쓸 수 있어요?

그런 모자라 하면 머리에 쓴 주황색 감귤 모자였다. 궁금해서 묻는다고 했지만 카페 주인의 말투에 억센 제주 사투리 억양이 섞여 있어 왜 그런 걸 돈 아깝게 사느냐고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예쁘잖아요.
아니, 예쁘긴 한데, 그것도 몇 만원 주고 샀을 거 아니에요. 여기서만 잠깐 쓸 건데 좀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거죠.
안 아까운데요.
하긴 그래야 또 제주 상권이 돌아가고 그렇죠?

여주인은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다는 듯 빠르게 인정하고 얼른 갖다 드릴게요, 했다. 나는 건물 안을 유심히 살피며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올드 앤 뉴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는 다양한 시간이 함축되어 있었다. 오래된 것을 억지로 없애지 않고 새로운 시간을 더하며 또 다른 시간을 쌓아가는 곳 같았다. 가파른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에도 올라갔다. 나무 복도 옆으로 일본식 방문과 다다미 판이 깔려 있었다. 이곳은 적산가옥敵産家屋이었다.

100년도 더 된 이 건물의 주인은 순아였다. 순아는 4.3과 한국전쟁 이후 이념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재일한국인으로서 차별받으면서도 억척스럽게 돈을 벌었다. 항상 고국을 그리워했고 언젠가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이 주택을 구입했다. 순아가 끝내 이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가끔 고향에 오면 호텔에 묵지 않고 이곳에 머물며 옛날에 먹었던 소박한 밥상을 즐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들에게 살암시라, 살암시믄 좋은 날 온다,라고 격려했단다. 순아는 카페 주인의  어머니였다. 카페 주인은 우리 할머니 시대의 아프고 힘든 이야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 건물을 허물지 않고 유지하는 것을 선택했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나 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여행 노트를 적는데 주인이 와 테이블 위에 턱, 감자를 올려놓았다.

이거 제주 감자예요, 구좌 감자.
아, 구좌 알아요. 감사합니다.

구좌는 제주에 와 처음 묵었던 숙소가 있던 곳이었다. 아는 지명이 나오니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구좌 감자라니. 주먹만 한 감자는 튼실하고 알이 꽉 차 보였고, 일반 감자와 다르게 더 맛있어 보였다. 얇은 껍질을 까서 한입 베어 물었다. 감자는... 감자 맛이었다.

다시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는데 짤랑짤랑 소리가 나며 미닫이문이 열리고 머리에 회색 베일을 쓴 수녀님 두 분이 들어오셨다. 수녀님 일행은 카페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더니 내 옆쪽 4인용 테이블에 앉으셨다.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데 주인이 또 한 번 말을 걸었다.

심심하면 여기 붙어요.

주인이 김치와 감자조림을 내왔고 수녀님들은 검은 봉지에서 김밥 세 줄을 꺼내셨다. 나는 j에게서 받은 오메기떡과 산행 후 남은 과자를 주섬주섬 챙겨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수녀님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 수녀님은 카페주인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는데 모두 존댓말을 했다. 수녀님들과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가만히 김밥을 먹으며 대화를 듣고 있는데 카페 주인이 또 물었다.

어떻게, 커피 한 잔 더 줄까요?
어유, 아니에요. 두 잔 마시면 저녁에 잠 못 자요.
그럼 차라도?
그냥 물이면 될 것 같아요.

여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왔다. 억센 말투의 카페 주인은 혼자 여행 온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수녀님들과의 대화는 엄숙하지도 않았고 주님의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과일이 먹고 싶은데 물가가 높아 매일 생으로 당근을 먹는다는 이야기, 성당 사람들에게 건넬 친환경 비누 세트를 만든 이야기 같은 아주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무해한 말투였다. 억양의 변화가 거의 없이 조근조근 말하면서도. 상대가 말할 때는 응, 응, 하며 고개를 자주 끄덕였는데, 별다를 것 없는 그 행동이 굉장히 사려 깊게 여겨졌다. 이런 분들만 있다면 세상이 시끄럽지 않고 은총이 가득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수녀님 한 분이 말했다.

얼마 전에 한 신자님이 나한테 고맙다고 빵 쿠폰을 보낸 거예요. 내가 빵 좋아하는 걸 알고. 아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요.
드시면 되잖아요.

곤란해하는 수녀님에게 내가 되물었다.

우리는 여기 안 가거든요.

순간 이 빵집에 대한 뉴스가 떠올랐다. 바게트의 본 고장 프랑스에 지점을 낸 것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이 회사의 공장에서는 유독 사망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다른 수녀님이 이어 말했다.

여기 안 간 지 좀 됐어요. 우리가 힘은 없지만 잘못된 거에는 잘못되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그 말을 하는 수녀님의 얼굴은 단호하면서도 동시에 인자다. 세상과 거리를 둔 채 교의에 전념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수녀님들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고 이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있었다.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일상을 살아가는 순아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그 사실을 이 오래된 건물에서 다시금 확인했다. 카페 주인이 내게 물었다.

여행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거의 3주 되어 가요.
3주요? 오래되셨네. 어디 어디 다녀오셨어요?
동부 갔다가 서부, 남부 거의 다 돌았어요. 한라산에도 다녀오고요.
제주도 사람들 한라산 안 가는데, 하하하.

카페 주인이 말했고, 수녀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너무 좋아서 두 번이나 갔다 왔어요.
어느 코스로 갔어요?
한 번은 어리목으로 갔다 어리목으로 내려왔고요, 두 번째 갈 때는 어리목에서 남벽분기점을 지나 돈내코로 내려왔어요.

수녀님 두 분과 카페 주인이 기겁을 하며 동시에 말했다.


돈내코요?
왜요?
거기는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에요.

카페 주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게, 어떻게 거길 갔을까. 역시 돈내코는 위험한 곳이었다.

카페 주인과 수녀님과의 대화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한 세기를 건너온 이 목조 건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우연면서 즐거운 만남이었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 좋았다. 앞으로 좋은 일들이 펼쳐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자료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RFWEWy6FJdg&list=PLlvcgagf8D5uT15tsJASTu1m85sJdYuk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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