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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Nov 25. 2023

제주도 푸른 밤


여기 사장님이 진짜 좋아. 여기 오는 사람들도 다 좋고. 요즘엔 잘 없는 분위기지. 1세대 게스트하우스라고나 할까.

도민은 어제부터 오늘 갈 게스트하우스에 대해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어제오늘 도민의 호언장담에 몇 번 당한 데다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를 선호하는 나로서 그의 발언은 불안하기만 했다. 도민은 j와 내가 소해장국을 먹기를 바랐던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이 게스트하우스 역시 좋아하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대상을 공유하려는 순수한 의도를 무시할 수는 없기에 그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도민은 오늘 만나게 될 사람들 때문인지, 밤새 술을 마실 생각 때문인지 점점 상기되고 있었다.

울타리 같이 생긴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누군가 빨간 꽃이 핀 동백나무 뒤에서 흑돼지를 굽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동백나무가 화염 속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캐리어를 끌다 말고 서서 불타는 동백나무를 촬영하는데 모자를 쓴 남자가 도민과 인사를 마치고 말을 건넸다.

서울이라면 신고가 들어가겠지만 이곳은 제주니까요.

모자를 쓴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민이 말한 이곳의 사장님인 듯했다. 연세가 좀 있어 보였고 생각보다 점잖은 분위기좀 놀랐다. 도민의 말에 따르면 낮에 바닷가에서 벵어돔을 잡아와 저녁에 투숙객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회를 쳐서 먹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사장은 따라오세요, 하더니 먼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교회를 개조한 듯한 키가 크고 창이 많은 특이한 건물이었다. 내부에는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탁자, 액자 같은 목공예품이 바닥에 늘어서 있었는데 모두 점잖은 사장님이 손수 만드신 것 같았다. j와 나는 침대 전시관이라고 적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높고 큰 방에 2층 침대가 네 개 있었고 모양이 제각각인 것으로 보아 침대 역시 사장의 솜씨인 듯했다. 사장은 오늘 밤 우리만 이곳을 쓰니 편하게 쓰라고 하고는 조용히 나갔다.

j와 나는 짐을 풀고 동시에 싸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j는 3박 4일간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제주를 떠난다. 아침 일찍 이동하려면 오늘 짐을 정리해야 했다. 짐 정리 후에는 다시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테이블을 셋팅했다. 우리를 포함해 투숙객은 열 명 정도였는데 모두 아는 사이인지 도민은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걸었다. 테이블 위에 사람들이 저마다 가져온 산해진미가 차려지고 j와 나는 도민의 옆에 앉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민과 달리 j와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흑돼지가 얼른 구워지기를 기다렸다.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남자분이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도민에게 말을 놓는 것으로 보아 40대 후반인 듯했다.

세 분은 어떻게 알고 지내는 사이예요?

도민과 j와 나는 짧게 눈을 마주쳤다. 내가 대답했다.

예전에 동호회에서 만났어요.
동호회 인연으로 제주도 여행까지? 대단한 인연이네.
그러게요. 여행은 언제 오셨어요?
오늘요. 일 끝나고 바로 왔죠. 여기가 제2의 집이거든요.

맞은편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자주 오죠. 주말에도 오고 그러니까. 제 와이프가 예전에 사귈 때 너는 왜 휴가 때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주도를 가냐고. 나를 막 의심하더라고. 그래서 여기를 한 번 데려왔지. 사장님도 보여드리고. 그랬더니 그제야 안심하더라고요. 여기는 믿어도 된다고. 그 뒤로는 제주도 간다고 하면 아무 말도 안 해. 여기가 그런 곳이에요.

도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말했다.

왜 지난번에 간 음식점 있지? 하와이 레스토랑.
응.
거기 부부도 여기서 만난 사이야.
아, 거기가 여기야?
응.
누구?

맞은편 남자가 끼어들었다. 도민이 어떤 이름을 말하자 맞은편 남자가 아, 하며 아는 체를 했다. 모두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맞은편 남자뿐이 아니었다. 반대쪽 모서리에 앉은 분도 그렇고 고기를 굽는 분도 그렇고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이삼십대에 이곳에서 맺은 인연을 사오십대가 되도록 이어가고 있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직도 이런 곳 아니, 이런 사람들이 있다니. 나이를 먹지 않는 피터팬이 사는 원더랜드라고 해야 할까. 도민이 1세대 게스트하우스라고 표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들은 60대가 되고 70대가 되어도 변함없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테이블 위에 빈 술병이 늘어갔다. 얼큰하게 취한 점잖은 사장님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어디선가 기타를 가져왔다. 사람들이 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마치 제 아버지를 바라보는 듯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 튜닝을 끝내고 6줄을 튕겼다.

떠나요

사장은 눈을 감고 씨익 웃었다. 테스형을 부른 가수가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휘슬을 불며 환호했다.

둘이서

기타 연주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의 합창이 시작됐다.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누군가는 테이블을 젬베 삼아 두들기기 시작했다.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밤하늘을 수놓은 별 아래서 사람들이 둘러앉아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밤사도 아닌데 나이가 지긋한 더 이상 젊지 않은 사람들이 단체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생경하면서 즐거우면서도 어딘지 애틋했다. 옆에 앉은 도민의 얼굴은 근심이 없는 듯 편해 보였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동백나무와 교회 같은 건물, 검은 밤과 반짝이는 별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주의 푸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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