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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Nov 18. 2023

소의 말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공평하지 않다. 어느 배에서 태어나 누구와 만나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운의 작용에 의해 누군가는 부유한 환경에서 축복받으며 승승장구하겠지만 누군가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불운에 신음하고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사회라면 사회 안전망을 두텁게 하여 불운에 노출된 이들이 살아갈 희망을 갖게 하고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불공평한 운의 영향을 줄이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회라면,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거나 무능하다면, 국민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오늘따라 서두가 긴 이유는 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이라는 곳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서슬 퍼런 일제의 무단 통치 기간이었으나 운 좋게 지주 집안에 태어나 풍족하게 자랐다. 다섯 살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외가 역시 세도가 집안에다 상당한 부자였기에 그의 유년 시절은 유복했다 할 수 있겠다. 일찍부터 그림을 잘 그려 화가로서의 그의 운명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같은 미술반 후배였다. 당시 그는 키도 훤칠하고 상당한 미남에다 그림 실력도 탁월해 인기가 많았고 그녀의 집안은 그 시절 여자를 교육시킬 만큼 깨어있고 부유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인인 그를 차별하지 않았고 먹고살기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며 결혼을 허락했다. 턱이 긴 그를 그녀는 아고리라 불렀고 그는 그녀를 유비군이라 불렀다.* 둘은 애틋했고 언젠가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자고 약속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며 일본의 패망이 감지되던 때 그는 그녀에게 급히 전보를 보낸다.      


마사코와 결혼 급해.


당시 전람회를 위해 귀국해 있던 그는 일본에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 체류하고 있었고 이 전보를 받은 그녀는 한일연락선을 타고 미군의 폭격과 어뢰의 공격을 피해 부산항에 들어온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직접 표를 구해와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그와 그녀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귀한 사과와 달걀을 양손 가득 들고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에서 유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땅도 많았고 그의 형이 사업가로 성공해 큰 재산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는 그녀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었다.


1945년 조선은 광복되었으나 38선이 그어지고 원산은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된다. 그의 형은 자본가로 몰려 수난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고, 그는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해 국가 원수의 초상화나 국기, 벽화를 그리는 일에 동원되었다. 힘 빠지는 일이었지만 사랑스러운 아내 남덕을 보며 힘을 냈다. 머지않아 첫아들을 얻었지만 디프테리아로 죽고 이후 2남을 얻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의 가족은 모든 것을 남겨두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부산까지 내려왔지만 생계가 막막했다. 그림만 그렸던 그에게 막일도 쉽지 않았다. 남덕이 거리로 나가 재봉일을 하며 벌어온 생활비로 근근이 먹고살았다. 1951년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그의 가족은 제주도로 보내졌고, 서귀포까지 내려가 세를 얻어 살았다. 1.4평의 좁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도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그는 바다에서 게를 잡고 고구마를 캐거나 부추를 뜯으며 힘겹게 살아갔다. 고된 삶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들 덕분이었다. 제주에 있는 동안 그가 자주 그렸던 것은 바다의 게와 물고기, 좁은 방에 얽혀있는 가족, 아이들의 모습 같은 것들이었다.


주에서는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다시 부산으로 올라왔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52년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 아내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헤어지는 것이 영 못마땅했지만 두 아들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받으면 형편이 좀 나아지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1956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들은 함께 하지 못한다. 딱 한 번 그가 일본에 일주일간 머문 것이 만남의 전부였다. 가족과 헤어져 있는 동안 그는 가족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막노동을 했고 시간이 나면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술을 마셨다. 극심한 생활고에 그림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워 담뱃갑 속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일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영양실조, 거식증, 간염에 황달, 정신병이 겹쳤고 그의 친구들이 병문안 차 그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침대 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방에는 병원비 독촉장이 가득했다. 그의 나이 고작 39세였다. 천재 화가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이었다.


의 이름은 이중섭이다.     


그가 10개월 정도 살았던 서귀포의 생가라 하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는 관 같은 방에는 그가 쓴 시가 걸려 있다.     


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을미년 사월 좋은 날


을미년이면 그가 죽기 바로 직전 해였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립지만 아름답다고 한 연유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을 환히 헤치며 살고자 했을 것이다. 기필코 살아내 반드시 가족을 만나고자 했던 그였지만 범람하듯 몰아치는 불운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가는 무능했고 천재 화가를 지키지 못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불운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중섭 거주지. 오른쪽 맨 끝에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좁은 복도를 지나면 방 한 칸이 있다.
1.4평의 관 같은 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아고(あご, 턱)리(李) - 턱이 긴 이중섭을 부르던 별명, 유비군(ゆび君, 발가락 군) -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쳤을 때 이중섭이 치료해 주면서 생긴 애칭. 문에 사용된 그림은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1941)

*그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다.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이남덕은 평생 수절 했고 작년 10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셋째 아들은 죽었고 둘째 아들 태성은 현재 일본에서 표구사를 운영하고 있다. 한때 이중섭의 유작이라 주장한 작품이 위조로 밝혀져 현재 입국금지 상태이다.     


*자료참조

https://namu.wiki/w/%EC%9D%B4%EC%A4%91%EC%84%AD#s-2.1

https://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02/2016060202559.html

https://www.chosun.com/culture-life/art-gallery/2022/08/30/DSIL3FPF5BDRNNXFRSPR5UPQKE/

https://www.news1.kr/articles/?3060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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