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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Nov 22. 2023

변태적 자기애


중섭의 거주지를 나와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로 향했다. 그가 산책을 다녔다는 흙길은 이제 말끔한 돌길로 바뀌었다. 거리를 따라 서 있는 구옥도 내부를 개조해 예쁜 소품샵이 되었다. 이중섭 거리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면 그냥 도로였을 오르막길을 사뿐히 걸었다. 어제 다리 근육을 충분히 풀어서인지 발걸음이 가볍다.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이 길 끝에 걸려 있다. 평화로운 평일 한낮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아직도 공연한다.

도민이 멈춰 선 곳은 낡고 빛바랜 건물 앞이었다. 오르막 중턱에 있어 건물이 마치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고 촌스러운 녹색 판에는 투박한 고딕체로 크게 ‘다음 프로’라고 적혀 있었다. 요즘말로 레트로한 감성의 건물이었다. 1963년 개관하였고 99년 문을 닫았으며 현재는 노천극장으로 재개관해 지역의 문화 예술인에게 무료로 대관해 준다고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시간이 응축된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막혀 있었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우리는 입구 반대쪽 유리문이 활짝 열린 곳으로 나갔다.

뭐야, 여기.

무언가에 이끌리듯 앞으로 나섰다. 아래로 경사 진 바닥은 여러 번 덧칠해 온갖 색이 울긋불긋 배합되어 시간의 흐름을 가늠케 했고, 고동색 나무 의자가 3열 종대로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저 앞에 의자와 같은 색깔의 빈 무대가 있었다. 소극장 크기의 아담한 무대였다. 무대 뒤로 ㄷ자형으로 돌벽이 에워싸고 있고, 돌벽 위로 마른 담쟁이덩굴의 가지가 한 폭의 그림 같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시간이 만들어낸 무대였다. 곧 완연한 봄이 찾아오면 이 담쟁이 가지에도 푸른 잎이 돋아날 것이다.

와, 이런 데서 공연하면 진짜 멋지겠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나, 사진 좀 찍어줘.

한달음에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공연이 끝나고 수고한 배우가 커튼콜에서 박수갈채를 받듯 무대 중앙에 서서 양팔을 벌렸다. 하늘에서 따스한 햇살이 조명처럼 내리쬐고 있었다.

오, 잘 나왔다. 봐봐.

도민이 찍어준 사진에는 돌벽으로 인해 그림자가 생겨 좌우로 음양이 나뉘었고, 한가운데 서 있는 나의 양팔은 좌우 대칭으로 우아하게 뻗어 있었다.

이 팔 라인 좀 봐. 뭐 이렇게 예뻐.

내가 감탄하고 있자 도민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자기애가 이상한 식으로 튀어나온단 말이지.

자기애라는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스스로에게 감탄했다는 것이 민망하면서도 뿌듯했다. 나를 사랑한 적이 언제였나. 사랑하긴 한 것일까. 한없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나를 한탄하고 몰아세우지 않았던가. 내팽개치지 않았던가. 이제는 나를 사랑한다. 불완전하고 부족함 투성이인 나를 사랑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 사실을 퇴색해 버린, 명을 다했다 다시 살아난 이 오래된 극장에서 알게 되었다. 도민은 나의 자기애가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두고 ‘변태적 자기애’라 이름 붙여주었다.




제주에 와 많은 바다를 보았지만 남쪽의 바다는 또 달랐다. 큰엉이라는 이름답게 깊고 묵직한 바다는 큰형 같이 듬직해 보였다. 엉은 제주말로 바닷가나 절벽에 뚫린 동굴을 뜻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구멍 뚫린 큰 언덕 혹은 절벽이 만들어낸 경승지였다.

우리 얼마나 시간 있어? 나 바다 좀 봐도 돼?
원하는 만큼 봐.
고마워.

절벽 위의 솟아난 돌 중 하나에 철퍼덕 앉았다. 봄의 시작을 알리듯 온기를 품은 바람을 느끼며 멀리 바다의 끝 혹은 시작처럼 보이는 둥근 선을 마주 보았다.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정처 없는 방황을 끝내고 현실과 마주할 준비를 서서히 시작해야 한다. 긴 여행으로 늘어난 짐을 추리듯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야 했다. b와의 관계도 그중 하나였다. 어떻게 할까. 방금 전 b는 철 지난 옷처럼 너무나도 늦게 유치한 고백을 해왔다.

아까 막히는 길 위에서 하늘에 비행기가 날잖아. 네 목소리 들려오고. 요즘 우울증이 왔나. 저걸 타면 너한테 갈 수 있겠지... 순간 울컥 앞이 흐릿해졌어.

목소리라 하면 얼마 전 바다 앞에서 낭독해 올린 릴스였다. 그걸 반복해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b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의 변화를 보는 것이 재미있지만 한편으로 당혹스러웠다. 서울에 가면 이별할 생각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서로의 행복을 빌며 깨끗이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b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정말로 끝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저 바다의 선이 끝인지 시작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왔다.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귀여워. 조심히 들어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큰형처럼 묵직하고 점잖은 바다가 사려 깊은 얼굴을 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변태적 자기애


시작 혹은 끝의 경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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