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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Dec 06. 2023

죽어도 좋아


도로를 건너면 제주목관아와 관덕정이었다.


고려 중기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방의 행정 단위 중 하나가 목牧이었고 이곳에 파견되는 지방관을 목사牧使라 불렀다. 요즘 말로 하면 도지사쯤 되니 목관아는 일종의 도청인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조선의 행정조직을 무너뜨리려 했던 일제는 이곳을 그야말로 조져놓았다. 그렇게 방치되다 1990년대에 이르러 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2002년에야 복원되었다.


반면 관덕정은 용케도 살아남아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되었다. 관덕정이 살아남은 이유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1448년(조선 세종) 외세의 침략을 대비하여 군인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지어졌고 이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으로서 기능했지만 일제는 이곳을 개조해 관청으로 쓴다. 관덕정을 없애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정치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1901년 부당한 세금 징수에 불만을 갖고 무장투쟁을 일으킨 이재수의 난이 있었고, 1947년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이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경찰이 발포한 곳도 바로 이 광장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7년 7개월간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인 3만명이 희생당하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지금은 한적한 원도심이 되었지만 한때 이곳은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의 피로 물들었었다.

폐허의 흔적이 사라진 잘 가꾸어진 목관아 안을 걸었다. 고요하고 아늑하고 따뜻했다. 제주에 왔을 때만도 사나운 바람이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는데 벌써 매화나무에 분홍 꽃이 피었다. 미세먼지 가득한 삭막한 서울은 아직 겨울이겠지. 먼 남쪽 땅으로 내려와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앞서 보고 있다. 짧은 사이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계절도. 그리고 나도. 곧 서울로 돌아간다. 이 방황을 끝내고 드디어 나의 일상이 있는 곳으로. 서울에 가면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방 안에 무기력하게 누워 지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 산 트래킹화를 신고 산에도 다닐 것이다. 일단 동네에 있는 개운산부터 가야지. 머릿속은 어느새 여행 이후의 삶을 계획하고 있었다.

걷다 보니 맨 안쪽에 다다랐다. 관아 내 유일한 2층 건물인 망경루望京樓에 올랐다. 서울을 그리워하는 다락이라니. 이렇게 솔직한 이름이 다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서울에 있는 임금을 기리는 장소였겠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들 두고 온 나의 삶을 그리워 했을 것이다. 목사는 여기에 서서 다시 서울 돌아갈 날을 기다렸을 것이어쩌면 나처럼 돌아간 이후의 삶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처마 너머로 키가 큰 건물과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곳이 서울 방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도심인 것 같았다. 난간에 기대어 멀리내다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오후에 전화한다더니. b였다.

사랑해.

뭐지. 난 데 없는 b의 고백은 벼룩의 간만큼도 설레지 않았다. 그 의아할 뿐이었다.

뭐야.
사랑한다고.
난 사랑 안 해.
정말?

b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난 사랑 이후의 단계야.

사랑의 유효기간이라는 3년은 애저녁에 지났다. 수명이 다해버린 관계를 오래도 끌었다. 이제는 안다. 더 이상 b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잠시 말이 없던 b가 말했다.

상관없어. 내가 사랑하니까.

콧방귀가 났다.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였다. 아까 어떤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던 데 반해 이번에 그가 한 말은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적응 안 되게.
언제 와?
왜?
마중 가려고.

전혀 b 답지 않은 말에 또다시 코웃음이 났다. 주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래라,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웬일이래.
그 정도는 해야지.
그동안 안 했잖아.
미안해.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난 것처럼. 미안해 라니. b가 사과한 일을 본 적이 없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b에게 사랑해 만큼이나 낯선 것이 미안해였다. 뭘 잘못 먹었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b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두고두고 놀릴 만한 거리였다.

안 하던 짓하면 죽는대.
죽어도 좋아.
옛날 영화 제목 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오는.
내가 죽기 전까지 네 옆에 있게 해줘.

너무나 뜬금없었다. 그리고 너무 늦어버렸다. 그 많은 시간을 우리는 놓쳐버렸다. 그저 자연스러운 결말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단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둔다.

모레 11시 반 비행기. 수속 밟고 나오면 1될 듯.
마중 갈게.
안 와도 돼.
갈 거야.

또다시 실소가 나왔다. b는 필사적이었다. 지난 오년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오늘은 어디가?
자꾸 묻지? 귀찮게.

b가 웃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역전이 됐네.

나도 웃었다.

네 글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이번에 다시 봤어. 네 문장의 생동과 함축성.
바보야, 당신마저 날 몰라보면 어떡해.
이제 알아봤잖아.
이제 알아보면 뭐.
이제 알아본 게 어디야.
그리고 내 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거든요.
아니야. 달라. 이번에 보면서 확신했어. 넌 글을 써야 하는 애라는 걸.

b는 이 말들을 준비해 놓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 한꺼번에 쏟아낼 리 없다. 이별 앞에서 b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갖가지 필살기를 시전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전략에 눈 뜨고 코 베인 듯 얼떨떨했다.

오늘 여행 노트도 기다릴게.

전화를 끊었다. 뻥 뚫린 파란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른나무에 초록 잎이 돋아나고 잔디도 푸릇한 색이 올라오고 있었다. 매화꽃도 피었다. 차가운 땅바닥이 따스한 온기에 녹듯 응고되었던 추운 마음이 녹아내렸다.

봄이 왔다.




자료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jqKNtuqmG2M&t=4s


https://www.visitjeju.net/kr/detail/view?contentsid=CONT_00000000050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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