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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과 Z의 차이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A93pBlwIzsE


깜깜한 밤 숙소에 돌아와 방문을 여니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상체를 세웠다. 이 방이 아닌가.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로 나와 여주인이 묵고 있는 독채의 문을 두드렸다.


방에 남자분이 계신데요.
남자분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아... 제가 착각했나 봐요. 쉬세요.


주인은 조용히 웃고는 문을 닫았다. 겉모습만 보고 오해를 했다. 다시 방문을 열자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괜스레 찔려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가방이 크네요, 하자 여자는 5일간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제주에 입도했다고 했다. 자아 찾기라는 테마로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아는 찾아지던가요?


여자는 대답 대신 웃어버렸다. 웃는 모습을 보니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 나이대의 순수함과 어리숙함은 숨길 수가 없다. 그것은 지나온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씻고 나왔을 때 여자는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일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밖에서는 낮에 본 여대생 일행과 남학생이 술자리를 마련하느라 부산했다. 여자가 일어나 물었다.


같이 나가실래요?
저는 일을 해야 해서.


여자는 목례를 하고 나갔다. 메일함에는 하루치의 일이 쌓여있었다. 여행지에서 일이라니. 사정을 모르면 호사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만 온전히 여행을 즐기지 못함의 다른 말이었다. 여행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반백수라고나 할까. 호기롭게 일감을 거절했다간 밥줄이 끊기는 수가 있었다. 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내일로 미뤄야지. 덕분에 내일은 일이다.

제가 모쏠이거든요.


미닫이 문 너머로 이십 대의 풋풋한 대화가 들려왔다.


어떻게 하면 남자친구가 생길지...


한 여대생이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쇳소리 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남자들이 경상도 사투리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남자의 면상이 궁금해졌다. 남자는 작년까지 래퍼가 되기 위해 자작랩을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이제는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데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로 이번 제주 여행을 택했다며 오늘 하루 무선 마이크를 들고 바다를 보며 랩을 했다고 했다. 여대생 일행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대학을 진학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는 사회 진출을 앞두고 우정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 번 보고 말 사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여행이란 그런 것인지 그들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얇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다 보니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충 일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그들과 조인하기 위해. 같은 방을 쓰는 여자가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왔고요, 오늘 여행 첫날이에요. 반가워요.


의례적으로 자기소개를 하자 남자가 대뜸 물었다.


몇 살이세요?
많아요.
얼마나 많으신데요?
굉장히 많습니다.
에이, 몇 살인데요. 그래봐야 삼십 대 아니에요?
마흔 하나요.


순간 정적이 일었다. 그러게 묻지 말라니까.


이후 그들은 나를 굉장히 어른 취급했다. 극존칭을 쓰고 인생의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이가 안 좋아진 동기 언니가 있는데 계속 연락을 해야 할까요?
저희 나이쯤엔 뭘 하는 게 좋아요?

그래, 그런 게 궁금할 나이지. 다 지나간단다.

소등시간까지 대화는 이어졌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도 저 때 저런 고민을 했겠지? 흘러가버린 시간만큼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이십 대 사이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살짝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꼰대여서일까. 그들의 고민거리는 더 이상 내게 고민도 아니었다. 앞으로 어느 게스트하우스를 가든 가장 나이가 많을 테고, 지금과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겠지.

이제 게하보다는 호텔을 잡아야 하는 나이가 된 건가.


씁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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