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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

by bxd Apr 2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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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jdM4YEL0xss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지런과는 거리가 먼 편인데 낯선 잠자리 탓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어제 미뤄둔 일을 마치고, 차를 예약하고, 호텔을 잡고, 제주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오늘은 조천읍으로 가서 아이들이 추천해 준 식당과 서점에 가볼 셈이다. 불현듯 유럽으로 배낭여행 갔던 때가 떠올랐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았는데, 그렇게 제주도 전역을 하나씩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명, 제주도 깨기.


버스에서 내려 바다를 따라 걸었다.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기도 했다. 제주 여행이 아니었다면 고향에 내려갔을 텐데, 외로이 혼자 생일을 맞을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사랑받지 못했으면서 사랑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버지 옆에 붙어 있기를 선택한 엄마. 그럴수록 아버지는 더 밖으로 돌았다. 아버지가 벌려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고된 노동에 몸이 망가져도 아버지는 엄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떻게 부부가 그럴 수 있나 싶었지만 그게 우리 부모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둑한 방의 천장이 보였다. 누워 있었는지 엄마가 부스스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잠은 죽어서 자면 된다는 개똥철학을 가진 엄마였지만 다리가 저리기 시작하면서 침대 신세가 되었다.

엄마, 보여?
바다네.
멋지지?
네.
제주는 밭에 난 무도 예쁘더라.


엄마가 웃었다. 뒤늦게 우산을 발견했는지 엄마가 물었다.


비 와?
어. 거기는?
여긴 안 와. 안 추워?
춥지.
추운데 무슨 전화를 해.
엄마한테 바다 보여주려고 했지. 엄마, 생일 축하해.
고마워.


엄마가 또 웃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오늘 처음 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생일을 알거나 챙기는 이는 말고 없으니까.


언제 올껴?
모르겠네.
조심해서 다녀.
엄마.
응.
수술받고 건강해져서 우리 여행 많이 다니자.


엄마가 다시 웃었다. 눈물이 났다. 엄마의 웃음에는 어떤 생기나 힘이 없었다. 엄마는 알 것이다. 이제 여행을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운 좋게 수술이 잘 되고 재활에 성공한대도 이전처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거 많이 보고, 그러려면 엄마가 건강해야 돼, 알지?
어.
사랑해.
엄마도 사랑해. 얼른 추운데 들어가.
몸 관리 잘하고 있어.
알았어.

여행을 하면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누구와 시간을 보내야 하고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여행은 가르쳐준다.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맹목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엄마.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물을 새도 없이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나의 어머니. 나로 인해 그녀가 남은 생에서 조금이나마 기쁨을 발견하기를, 그래도 딸이 있어 이만하면 잘살았다고 생각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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