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은 시각, 비를 뚫고 간 곳은 골목에 위치한 조용한 카페였다. 제주에는 예쁜 카페가 참 많은데 이곳도 그중 하나였다. 카운터에는 뽀글 머리를 한 강아지가 제 몸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딘지 슬퍼 보이는 아이였다. 손님이 아는 체를 해도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치켜올릴 뿐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소 주인이 잘 놀아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지루하면서도 외로워 보였다. 이 아이는 이곳의 데코인 것일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것들은 티가 났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제주 여행을 위해 유일하게 준비한 일이 책방에 들러 책을 산 것이었다. 평소 읽지도 않은 책을 여행까지 와서 굳이 읽으려 했던 이유는 힘을 얻고 싶어서였다. 책 속에 답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하면 잘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렇게 발견한 게 이 책이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인생은 한번뿐. 노트 같은 느낌의 제목이었다. 저자의 이름은 글배우. 검색창에 이름을 검색하니 저자의 사진이 떴다.
뭐야, 뭐 이리 잘생겼어?
삼십 대 중반의 멀끔한 생김을 보고 배우인가 했는데 글을 배웁니다의 준 말이었다. sns에 올린 글이 입소문을 타면서 작가가 되었다는데, 벌써 여러 권의 책을 낸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세상은 불공평하단 말이지.
꿈을 꾸세요.
꿈을 실행하세요.
꿈을 지키세요.
-글배우
저자는 꿈을 지키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를 문학소녀로 규정할 만큼 책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여러 작가의 글을 필사하면서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했고 남몰래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겐 재능이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책을 잘 읽지 않게 된 건 그 무렵부터였다. 나의 꼬인 심성은 좋아했던 책마저 거리를 두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읽는 것 자체가 고통인 시기가 있었다. 좋은 책을 만나면 그들의 재능을 질투하고 내게 없는 소질에 괴로워했다. 가끔 이렇게 책을 들춰볼 수 있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을 거는 듯한 짧은 문장에 빠져들 듯 읽었다. 오래 고민하고 쓴 글은 티가 난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바로 지금처럼.
책을 덮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카운터의 강아지는 큰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어제는 종일 걸었고, 오늘은 얌전히 책을 보고 있다. 내일이 되면 어제와 오늘의 기억도 곧 잊히겠지. 그래도 여행의 기록은 남겨야지 싶어 sns에 사진과 함께 짧게 소식을 남겼다. 머지않아 댓글이 달렸다.
코스가 좋네요. 샨티 고양이는 안녕하신가?
아침에 숙소에서 만난점박이 고양이가 생각났다. 이 분이그 아이를 어떻게 알지? 십 년쯤 전 잠시 나갔던 동호회에서 만난 분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선가 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이 분도 이곳에 머물렀던 것인가. 세상 참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