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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생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7X-QTxYEg5E&t=2s


잘됐어. 네가 훨씬 아까워.


이른 아침 인적 없는 바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동이 트자마자 숙소를 떠나왔다. 내일 렌트카를 반납하기 위해 오늘은 제주시로 넘어갈 예정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제주는 일주일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야 했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김녕해수욕장에 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여러 색이 섞인 투명한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푹신한 모래 위를 걸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와 차알싹 파도소리를 내며 볼따귀를 때리고 갔다. 바람을 맞았다. 잠시 바람이 들었었다. 어제의 일을 바람에 날려 보냈다.


백사장에 앉아 등 뒤로 올라오는 따사로운 태양의 온기를 느끼며 멍하니 바다와 바람을 느끼는 중이었다. 제주의 바다는 특별했다. 조수가 넘나들며 펄에 온갖 생물을 품는 서해가 마음씨 좋은 엄마 같다면, 깊고 묵직한 동해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 같았다. 그에 비해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수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남해는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야심 있는 청년 같았다. 반면 제주의 바다는 아기자기한 소녀 같았다. 한없이 맑고 투명한 소녀. 순수한 소녀의 모습을 한 제주 바다가 때 묻지 않고 이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건 헛된 바람일까.


어제 불같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b에게 소리 지른 것은 어른스럽지 못했지만 이별하기에 이만한 것도 없었다. 이별은 언제나 추했다. 아름다운 이별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과도 같다. 이제 그만 무의미한 생명 연장은 그만두어야 한다. 오래 생각했고 이제는 정말 받아들여야 한다. 이별해야만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무얼 시작한단 말인가. 내게 시작할 힘이 남아있을까. 다시는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 내겐 어떤 열정도 의지도 영감도 사라졌다.


소녀 같은 바다를 가만히 응시하며 파도 내는 규칙적인 파열음이 아침잠 많은 바다의 코골이 같다고 생각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눈을 감았다.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다의 숨소리를 깨고 어디선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모르는 번호였다.


네.

여기 렌트카 업체인데요.

네.

왜 반납 안 하세요?

헉! 오늘인가요? 내일 아닌가요?


수화기 너머 중년 여성의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괜찮나요?

괜찮고요, 십분 단위로 연체료 과금됩니다.

네, 빨리 갈게요.


전화를 끊고 서둘러 모닝에게 뛰어갔다.


내가 그럼 그렇지. 이 허당.


이것이 인생이다. 한가하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 없다.




기름값 좀 빼주시면 안 되나요?


반납일을 착각하고 오늘까지 사용할 것을 대비해 넉넉하게 기름을 채워둔 터였다. 연체비를 지불하며 기름값 좀 빼달라고 하자 직원은 한 칸 이상 차이가 나지 않아 안 된다고 짤 없이 거절했다. 모닝과는 인사도 나눌 새 없이 이별했다. 아름다운 이별이 있다면 런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짐을 빼고 돌아서면 끝인 짧고 깨끗한 이별. 내가 타고 다닌 모닝은 다른 사람이 예약해 둔 터라 다른 업체를 이용해야 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며 새 모닝을 예약하고 새 렌트카 업체를 배정받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잠시 나도 사람들을 따라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주와는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새 렌트카 회사의 좁은 사무실 안에서 노트북을 켰다. 새 모닝을 만나려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짐을 끌고 다니는 여행객과 업체 직원이 저 여자는 뭐지, 하는 시선으로 흘끔 댔지만 나의 일자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니터 화면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숙소를 알아봐야 했고 일도 처리해야 했다. 그 바람에 지난밤 일은 깡그리 지워졌다.


이것이 인생이다. 한가하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 없다.


첫 번째 모닝이 감성 충만한 미색이었다면 두 번째 모닝은 시적인 느낌의 티탄그레이색 최신형 모닝이었다. 기름도 만땅에 내부에는 핸드폰 거치대와 충전 잭도 꽂혀 있었다.


아주 멋진 녀석인데.


새 모닝을 보자 방금 전 공항에서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컨셉을바꿔볼까. 쉬엄쉬엄 여유 있게? 근사한 카페에서 책도 읽는 거지. 이제까지의 일들이 물러가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이 몽글몽글 구름처럼 피어났다. 처음 닥치는 대로 일정을 집어넣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사이 꽤 많은 일이 있었고 나도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모닝아, 앞으로 일주일 잘 부탁한다.


모닝에 인사를 건네고 시동을 걸었다. 모닝이 응답하듯 소리를 냈다.


자, 이제 어디를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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