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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이불킥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Hz3Vc7mguBI


나는 왜 이곳까지 와서 돈은 돈 대로 쓰고 이 꼴을 당한 거지.


호텔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펼쳐져 있는 캐리어며 세면대 위에 널브러진 화장도구를 보자 욱하는 심정이 올라왔다.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손을 닦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화장도구를 집어 파우치 안에 넣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아직 화장기가 남아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빨갰다.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확실히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디에 있든 존재감 없이 한 구석에 앉아 말없이 창밖을 보는 게 나였다. 외모가 출중하거나 머리가 비상하거나 성격이 무던하거나 어느 것에도 해당 사항이 없었다. 평범함 얼굴에 지방대를 나왔고 우울과 예민을 늘 달고 살았다. 좀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주목이나 관심을 받아본 일도 드물었다. 다행히도 나는 남의 시선보다 내가 보는 내가 더 중요했고, 남과 어울리기보다 남이 모르는 혼자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더 재미를 느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때그때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주변 이들도 바뀌었지만 오래도록 유지되는 관계는 없었다. 독립적인 척, 혼자서도 잘 지내는 척했지만 사실은 외로웠다. 외롭고, 외롭고, 외로웠다.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겠지. 한 번도 증명되지 않은 나의 재능과 수수한 매력이 있는 취향, 부조리에 분노하는 양심, 생을 조감하는 깊이 같은 무형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 글쓰기를 시도했던 것도 글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의 글은 단 한 번도 심사위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생명을 잃었다. b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도 b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의 일방적인 구애로 시작된 관계는 한 번도 쌍방이 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이제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나를 비껴갈 것이다. 잊을 만하면 표적처럼 튀어나오는 이 자격지심. 나를 좀먹는 이 패배주의.


기분이 최악일 때 눈치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b였다. 분노와 짜증과 원망의 불똥이 b에게 튀었다. 그날 b가 차를 돌리지만 않았어도 제주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b가 좋은 사람 만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다면 가이드에게 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b가 나를 알아봤다면 우리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면 그렇게 쉽게 헤어짐을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게 b의 탓이다.


왜.

잘 만났어?

몰라. 묻지 마.

어디까지 갔어? 손은 잡았어? 키스도 한 거야?

아, 뭔 소리야.

이제 보니 그놈 만나러 제주도 간 거였네.

약 올리려고 전화했어?

잘됐네. 잘해봐. 거기서.

(한숨) 또 시작이네.

또 언제 만나기로 했어?

아니라니까.

지금 같이 있는 거 아냐?

아, 짜증 나니까 그만 끊어.

그래도 그렇게 가자마자 그럴 수가 있냐, 그렇게 안 봤는데 아...

(겹쳐서) 앞으로 전화하지 마.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불킥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내일 일을 하고 움직이려면 1분이라도 더 눈을 붙여야 했지만 수치심 때문인지, 커피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십 대도 아닌데 고작 이따위 일에 이토록 반응하게 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장난에 급소를 맞은 것 마냥 여파가 오래갔다. 우울과 절망의 심연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후회와 부정의 단계를 지나고 있었다.


어쩌자고 커피를 시켜서... 쓴 돈이 얼마인데...


배려한다고 가장 싼 커피를 시킨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딸기 딜라이트 요거트나 제주 유기농 말차로 만든 크림 프라푸치노 같은 가장 비싼 메뉴를 그것도 벤티 사이즈로 시켰어야 했다. 밥값도 그냥 더치하지, 왜 낸다고 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를 잠 못 들게 한 그놈은 두 다리 뻗고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이불을 걷어찼다. 조명을 켜고 지난번 쓰지 못한 크래프트 표지의 노트를 펼쳤다. 이 방에 머문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노트를 하나하나 읽었다. 커플의 알콩달콩한 이야기에는 응, 곧 헤어질 거야, 하며 저주를 퍼부었고, 혼자 온 여행객들의 사연에는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빈 페이지에 이르러 연필을 꺼내 들었다. 뭐라고 쓸까. 연필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삶의 한 지점에서 길을 잃고 있는 당신이 머지않아 길을 찾고, 다시 떠날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이번 여행으로 인생의 답은 찾을 수 없겠지만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나를 더 사랑하고 지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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