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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7hLOzJGNhxA


차를 댄 곳은 광치기해변이었다. 벌써 세 번째 오는 곳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부서지며 만들어지는 무채색 포말도 칠흑 같은 어둠이 감추고 있었다. 깜깜한 밤 오렌지색 실내등 불빛 아래서 커피를 홀짝이며 오늘 밤 잠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면서 커피를 시킨 것은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잠에서 깨야 했기 때문이었다. 반전 가득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생각 없이 웃게 되면서도 동시에 피곤해졌다. 기가 빨리는 기분이랄까.

그는 참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치지 않았는데 과거사와 연애사를 지나 이제는 십여 년 전 인도 여행 이야기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휴게소에서 화장실을 갔는데 돌아와 보니 버스가 사라지고 없었고, 버스 안에 있던 여권이며 지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처음엔 저걸 다 어떻게 기억하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상황을 장면으로 기억하는 듯했다. 연속적으로 수없이 교체되는 영화 속 프레임처럼 그는 인생의 주요 순간을 프레임으로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온갖 것을 기억해야 하는 창작자에게 좋은 습관이었다. 그가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진지하면서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예술가의 유전자를 타고 난 사람이 밥벌이에 골몰하고 있다니. 아쉬운 대목이었다.

밥벌이와 꿈의 경계에서 대개는 전자를 택했다. 용기 있게 후자를 선택해 꿈을 업으로 삼은 이들도 밥벌이는 언제나 최대 고민거리였고 가까이서 본 그들의 모습은 기대한 것만큼 멋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추하고 속물처럼 보였다. 나 역시 호기롭게 꿈을 선택했다가 초라해지는 모습을 견디지 못해 밥벌이를 택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꿈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나를 먹먹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처음 그에게 시선이 간 것도 그가 한 때 꿈을 좇았던 점 때문이다. 꿈을 향해 찬란한 날갯짓을 하다 날개가 부러져 차가운 현실로 곤두박질쳤고, 이제는 남들처럼 두 다리로 걷는 연습을 해야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그 참담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흐, 좋다.

그가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몽차를 꿀떡 삼키고는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콧바람과 함께 실소가 나며 또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아저씨, 약주 한 잔 하셨어요?
하하. 아저씨 같았나요? 너무 뜨거워서.

그가 또 아이같이 웃었다. 덧니가 빼꼼 존재를 드러냈다. 그의 웃음 때문인지 덧니 때문인지 또 따라 웃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확실히 자주 웃게 된다. 결이 맞는다는 신호였다. 사람을 가리는 나로서 맞지 않는 사람은 대번에 알아봤다. 얼굴이 굳고 말수가 줄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결정의 순간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판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나의 상태를 곰곰이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 이르는 길이기도 했다. 말이 좀 많은 것을 빼면 그는 확실히 내가 선호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이런 일 하시면 사람도 많이 만나고 저같이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아요.
간혹 그러기도 하는데 생각처럼 많지는 않아요.
그래요? 친절해서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그렇진 않아요. 하하.
제가 보자고 했을 때 어땠어요?
뭐가요?
이 여자가 왜 연락을 하나, 무슨 속셈일까 그런 생각 안 했어요?
같이 식사하려나 보다 했죠.
끝?
뭐... 그런... 이성으로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했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몇 시간 전 유리창 너머로 본 그 얼굴이었다. 괜히 만나자고 했나 후회를 불러오던 그 얼굴. 일순간 차 안 공기가 이질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는 거절의 말을 고르는 중이었다. 어색한 공기를 채우기 위해 다시 입을 뗐다.

그날 투어 끝나고 한 번 더 보고 싶더라고요. 얘기도 잘 통할 것 같고, 취향도 맞는 것 같고. 이렇게 만날 줄은 예상 못했지만. 사실 오늘 만날 생각을 하니까 좀 설레더라고요. 하하.

얼굴이 달아오르며 어색한 웃음이 났다.

저 지금 엄청 용기 내서 말하는 거예요.

멋쩍어 웃는 나와 달리 그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랑... 무엇을 바라시는데요?
모르겠어요, 저도.
제가 지금 누구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돈도 없고, 또 여행 중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많이 망설였어요. 만나자고 할까 말까. 일단 한 번 만나 보자 그럼 알게 되겠지. 사실 오늘 만나면 저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어요. 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취향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죄송해요. 제가 오늘 말이 많았죠.
네. 하하. 아무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바라는지. 그래서 말인데 내일 시간 돼요? 한 번 더 보면 알 것 같요.

그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무거운 입을 뗐다.

내일은 제가 투어 상품 기획안을 만들고 있는데 그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하나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다른 거에 시간을 내기가 좀 그래요. 죄송합니다.

그가 정중히 거절했다. 정중히 거절당했다. 거절당하지 않은 척 경쾌하게 이야기했다.

확실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갈까요?

광치기해변에서 숙소까지는 차로 2분도 안 걸렸다. 그동안 그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고 목표하시는 일들 꼭 이루시길 바래요. 돈도 많이 버시고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돈이 그렇게 쉽게 벌어지는 건 줄 아나. 상대는 알 리 없는 소심한 복수였다. 그는 짧게 쌤도요 했다. 목 인사를 하고 차문을 열다 문득 생각났다.

참, 오늘 저랑 한 이야기 나중에 제가 써도 돼요? 쓸지 안 쓸지 모르겠지만 혹시 쓰게 된다면요.
그럼요. 마음껏 쓰세요. 제 이름만 안 넣으시면 돼요.
쓰더라도 이름은 안 넣겠습니다. 그럼 진짜 갑니다.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고 돌아섰다. 자갈로 된 주차장을 걸어 호텔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었다.



*사용된 일러스트는 한 웹툰 스터디 카페에서 발견한 저작물입니다. 오래된 카페여서 가입이 안 되어 사용 여부를 승인받지 못했습니다. 혹시 저작권자가 보시게 된다면 댓글이나 메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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