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는 입을 굳게 다문채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순간 괜히 만나자고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똑똑. 보조석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내 쪽을 보더니 유리창을 내리곤 타세요, 했다. 굳어있던 얼굴이 금세 해사하게 바뀌었다.
오늘 나오기 싫었죠? 아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난번하고 분위기가 달라서요. 아... 오늘 좀 일이 잘 안 풀렸거든요. 그 생각 좀 하느라고. 고객들 있을 때는 티 안 내려고 하는데 그게 보였어요? 티 안 나요. 그래도 한 때 글 쓴다고 사람 연구하고 그랬는데 그 정도는 알아보죠. 그럼 저 좀 연구해 주세요.
그가 지나가듯 말을 던지곤 혼자 웃었다. 그게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 알고 하는 말일까. 묘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남자의 말이란 의미 없는, 단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습관적인 지껄임이며 의미 없이 지껄일수록 그것이 여자에게 더 잘 먹혀든다고 했다.
해물찜 집으로 이동하며 그는 오늘 잘 풀리지 않았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 통화할 때도 느꼈지만 말이 참 많은 것이 외로운 사람임이 분명했다. 일 이야기가 끝나고 그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연기하시는 줄 알았어요. 아... 죄송해요. 놀라셨죠. 놀라진 않았어요. 거짓말인가, 진짜인가 헷갈리는데 목소리가 아무래도 진짜 같은 거예요. 그래서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 엄청 잘 잤어요. 제가 오해했더라고요. 어제 그분들이랑 술 한 잔 하면서 잘 풀었어요. 잘 됐네요. 그날 감사했습니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마음이 놓였어요. 그럴 수도 있죠. 근데... 저를 어떻게 믿으세요?
그가 핸들을 잡고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도로가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가 얘기하지 않았나요? 제주에 별 사람 다 있어요. 신분 세탁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저도 그런 사람일 수 있잖아요.
그가 여전히 정면을 보며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 봐 봐요.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거든요.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
몸의 방향을 틀어 그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내 쪽을 힐끔 댔다. 웃음을 참는지 입술이 달싹거렸다.
음식점 안은 술잔을 기울이는 중년 부부를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천장이 높아 큰 평수의 술집이 더 넓어 보였다.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본 그는 가격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내가 해물찜을 시키며 술은 안 한다고 하자 그가 또다시 놀라워했다.
아니, 어떻게 해물찜에 술을 안 마실 수가 있어요? 몸이 술이 안 받아요. 한 잔만 마셔도 빨개져요.
그가 주황색 당근전을 젓가락으로 찢으며 말했다.
제가 한 때 알콜 중독이었어요. 네? 그것 때문에 완전히 몸이 망가졌었거든요. 지금 이렇게 산에 올라가는 게 기적일 정도로. 언제요? 이십 대 후반부터? 몇 년을 그랬죠. 왜 그랬어요? 영화도 안 풀리고, 세상도 원망스럽고. 그래서 그렇게 풀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안 마셔요? 늘 제어하고 있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런 거 먹으면 술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죠. 메뉴를 잘못 골랐나 보네. 아니에요. 해물찜 정말 오랜만이에요. 많이 드세요.
갖가지 해산물이 담긴 대형 솥이 나오자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조개를 꺼내 내 앞접시에 올렸다.
해산물 좋아하시나 보다. 네. 집에서 밥은 잘해 드세요? 그럼요. 요리 못하실 거 같은데. 하하. 제가 하는 요리는 남들하고 좀 달라요. 예를 들어 김치를 담근다, 그러면 시장에서 일단 배추를 사요. 인터넷 이런 거 하나도 안 찾아보고 그냥 마음대로 재료 넣고 해서 먹어요. 멸치액젓이 없다 그럼 안 넣고 있는 재료만 넣어요. 그럼 오묘한 맛이 되거든요. 하하. 그렇게 먹어요. 왜 그렇게 해요? 몸도 위기 상황을 느끼면 내장기관 같은 것들이 긴장하면서 더 건강해진대요. 일종의 극기 훈련 같은 거죠.
그가 위생장갑도 끼지 않은 채 연신 앗 뜨거 앗 뜨거 하며 맨손으로 딱새우의 껍질을 뜯었다. 장갑 끼세요 하니, 이런 건 손맛이라며 하나 까드릴까요 했다. 새우로부터 나온 육수가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려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코앞에서 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고개를 숙였다.
왜요? 아니, 지난번에 봤을 때는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이제 보니 완전 애네.
그가 부끄러운 듯 소리가 나게 웃었다.
왜? 제가 왜 애예요? 손이 완전 애기 손이네. 고생 한 번 안 해본 손이야.
어제 술자리에서 여자에게 들은 말이었다. 어제 숙소 사람들을 보며 내가 참 철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에 비하면 그는 그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애였다. 이런 사람에게 위로를 받았다니 얼척이 없어 더 웃음이 났다. 내가 끅끅 대자 나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그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저 애예요. 하하. 집에서는 아직도 저를 왕자님이라고 불러요. 왕자님... 크크큭. 진짜예요. 집에 전화하면 엄마가 왕자님 잘 지내냐고 물어요. 하하. 제가 좀 오냐오냐 컸죠. 영화할 때도 부모님이 다 뒷바라지해 주셨으니까. 아... 그래서 이제 영화는 안 해요?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지금 보이는 것들을 하고 싶어요. 지금 보이는 게 뭔데요? 돈 버는 거? 그의 대답에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정말 돈을 벌 거라면 말 끄는 알바 같은 시급이 센 일로 먼저 목돈을 만들어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투어로는 꾸준한 밥벌이가 어려웠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가 흥정에 소질이 없듯 그는 돈 버는 데 소질이 없어 보였다. 세상물정 모른 채 제멋대로 살아야 하는 영락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그와 돈은 잘 매치가 안 됐다.
돈을 어떻게 벌건데요? 트래킹 상품을 개발할 거예요. 그게 돈이 돼요? 그럼요. 지금은 안 되지만. 하하. 이게 경기를 타더라고요. 코로나 때는 사람들이 제주도에 많이 와서 잘 됐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일본으로 빠지고 하니까 힘드네요. 그래서 해외에서 하는 트래킹 상품도 만들어 볼 생각 중이에요. 제가 많이 늦었잖아요. 열심히 해야죠. 남들은 결혼하고 어느 정도 모아둔 자산도 있을 나이인데 저는 통장에 20만원 밖에 없거든요. 하하. 20만원 가지고 어떻게 살아요? 그렇죠. 하하. 그래서 아끼면서 살아요. 집도 16도로 해두고. 16도요?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예요? 22도만 돼도 추운데.
그의 이야기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코미디 영화 같았고 그가 내뱉는 대사에 족족 웃음이 터졌다. 가이드도 좋지만 말하는 직업 쪽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름하여 반전의 스피치. 히죽대는 나와 달리 이번에 그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 아는 분이 집 안을 17도로 해두고 사는데 처음에는 너무 추웠는데 몸이 거기에 적응한다는 거예요. 아,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구나. 그럼 나도 해보지 뭐, 해서 16도로 살고 있는데 생각보다 살만 해요. 잘 때 옷 몇 겹씩 껴입고 자고 있어요. 그러다 골병 나서 나중에 더 고생해요.
내 대답에 그가 또 크게 하하 웃었다. 자기도 민망해서 웃는 것 같았다. 허를 찌른다고 해야 할까.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대화가 예측 불허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웃겨서 나는 웃음이기도 했지만 기가 막혀서 나는 웃음이기도 했다. 이 대책 없는 남자를 어이할꼬.
제가 낼게요. 아니에요, 더치까지는 생각하고 왔어요. 통장에 20만원밖에 없다면서요.여긴 제가 살 테니까 커피나 한잔 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