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푹 잤다. 전날까지만 해도 단 한순간도 있기 싫었던 곳에서 숙면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잠에서 깬 이후에도 노트북으로 일을 마치고 최대한 늦게 나왔다. 그들은 괘념치 않겠지만 숙소에 대한 오해를 사과하고 싶었다. 체크아웃 시간에 딱 맞춰 캐리어를 끌고 나왔을 때 두 번째 보는 남자가 구름색 수면바지를 입고 남색 수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아는 사람도 없을 거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술값 얼마 드려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됐어요, 얼마 안 나왔는데요. 그럼 제가 죄송해요. 카톡으로 알려주세요.
남자는 고개를 까닥했는데 그의 성정상 알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목인사를 하고 유리문을 여는데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숙소 좋죠? 네. 정말요. 하하.
#2 물멍
갓길에 모닝을 세워두고 아무도 없는 소금막해변을 걸었다. 어제와 그제 본 남자가 물멍하기 좋다고 추천한 곳이었다. 최초의 발자국을 만들며 걷는데 모래가 스타킹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2월의 백사장은 제아무리 제주라도 차가웠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아니라 냉장실에서 꺼낸 버터바 위를 걷는 것 같은 푹신하면서도 청량감을 주는 차가움이었다. 스타킹 망보다 작은 모래알들이 발가락 사이로 들어와 들러붙었다. 백사장 중간 검은 바위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으며 물멍의 시간을 가졌다.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3 홀로 그리고 함께
표선면에서 성산읍으로 넘어왔다. 이렇게 다시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온 여행인데 꽤나 다이내믹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웃음이 났다. 지난 일주일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잊고 지내던 내 안의 나와도 조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또 한 번 웃음이 났다. 내비는 김영갑갤러리로 안내하고 있었다. 어제 가이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르면서 아는 척을한 작가의 이름과 글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행동은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고 엉뚱했다. 그래서 또다시 웃음이 났다.
왜 이렇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거지.
입구에 서 있는 감귤 치마를 입은 철제 조형물과 크고 작은 나무와 곳곳에 배치된 토우를 다시 한번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 비문 앞에 섰다.
#4 이별의 조짐
식당에서 나왔을 때 b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수백 가지의 감정이 뒤엉키며 괜스레 얼굴이 굳어졌다. 말도 퉁명스럽게 나왔다. 입버릇처럼 잘도 헤어짐을 운운하던 그였다.
기분은 좀 풀렸어? 아니. 오늘은 어디 가? 나 오늘 누구 만나. 누구? 있어, 그런 사람. 남자구나? 응. 잘 만나봐. 그럴 거야. 사귀자고 해. 내가 알아서 할게. (사이) 질투 나네. 좋은 사람 만나라매. 서울 오지 말고 거기서 살지 그래? 그런 얘기할 거면 끊어.
그리고는 진짜 전화를 끊어버렸다.
#5 카네이션
국화꽃이 없다고 해서 가장 비슷한 게 뭐냐고 물으니 카네이션이라고 했다. 원래 한 송이만 사려고 했는데 꽃집 아줌마가 조문하려면 세 송이는 있어야죠, 했다. 흥정에 소질이 없는 나는 그럼 주세요, 했다.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광치기 해변을 지나 4.3성산읍희생자추모공원으로 향했다. 지난번 빈손으로 간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위령비 앞에 꽃을 두고 눈을 감았다.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으로서 기억하고 분노하고 아파하겠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6그대를 만나는 곳 백 미터 전
지난번 묵었던 호텔 방 번호를 대며 가장 비슷한 구조의 방을 달라고 했다. 지난번과 같은 층 다른 공간의 방문을 열자 익숙하면서 낯선 공간이 나왔다. 짐을 풀고 대자로 침대에 누웠다.오래된 노래가 떠올랐다. 덥수룩한 머리에 잠자리 안경과 나비넥타이를 한 가수는 하늘엔 구름이 솜사탕이 아닐까라며 고백하기 전 설렘을 노래했었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지. 이렇게 만나도 되는 건가. 나는 무얼 원하는 거지. b와는 이대로 이별인 건가. 정녕.
얕은 숨을 내쉬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떴다. 애벌레가 이동하기 위해 몸을 반으로 굽히는 것처럼 상체를 반으로 접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단장을 시작했다. 제주에 와서 처음 하는 화장이었다. 화장을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