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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

by bxd Jul 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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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6TWFv8CNbjg&t=1s


갤러리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시골 길에 있었다. 철문 안으로 들어가자 귤색 치마를 입은 여성의 철제 조형물이 있었고 치마폭에 ‘외진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시간이 되면 두모악에 꼭 가봐. 내가 제주에 살게 된 것도 김영갑 선생님의 영향이 컸거든.

도민이 그 말을 했을 때 가보라는 건지, 가지 말라는 건지 헷갈렸다. ‘시간이 되면’과 ‘꼭’은 양립할 수 없는 표현 같았다. 선택과 의무라는 이율배반적 가치가 담긴 두 말의 조합이 어색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김영갑이란 이름을 기억해 내는 데도 애를 먹었다. 금시초문 작가의 갤러리에 온 것은 순전히 시간이 되어서였다. 민속마을을 걷고 따라비오름 정상에 올랐는데도 아직 하늘이 파랬다. 그렇다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앞으로 세 시간. 전시를 보기에 딱 맞는 시간이었다.

두모악은 머리가 없는 산 두무악(頭無嶽) 그러니까, 한라산의 옛 이름이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 곳곳에 익살스러운 표정의 토우가 자리하고 있었고, 여러 갈래로 뻗은 길을 무심코 걷다 보면 키가 크고 작은 다양한 생김의 나무와 만났다. 누가 관리하는지 애정이 깃든 곳이었다. 마당 저 끝에 잎을 잃은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바탕의 아담한 갤러리가 보였다.

작가는 폐교를 직접 개조해 만든 이곳에서 실제 생활했고 작업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그의 유골이 이곳에 뿌려졌다. 마흔아홉 참으로 짧은 인생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두 살 많던 그의 나이 마흔셋, 오십견인 줄 알았던 통증이 루게릭병으로 밝혀지고 이후 6년간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고 카메라 셔터를 누를 힘도 없이 졸참나무 이파리처럼 야위어 갈 때도 그는 이곳에서 지냈다.


움직일 수 없게 되니 욕심 부릴 수 없게 되니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고 나머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철들면 죽는 게 인생. 여한 없다. 원 없이 사진 찍었고, 남김없이 치열하게 살았다.

-김영갑


1957년 우리 아버지와 같은 해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20대에 처음 제주를 방문했고, 이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제주 사진을 찍다 28살에 아예 제주로 이주해 평생을 제주에 그중에서도 중산간지대 오름에 집중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샀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를 먹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제주의 아름다움과 자연환경을 20년 가까이 포착하였다. 그가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그의 투병 생활도 시작되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죽어가는 근육을 손수 놀리며 이곳을 가꾸었다. 애정이 담긴 곳이라고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셈이.


제주에 몰두한 한 예술가의 영혼이 깃든 곳이라는 사실만으로 이곳에 꼭 와야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티켓 대신 작가의 작품 사진이 박제된 엽서를 받아 들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늦은 오후인데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관람객이 더러 있었다. 회장 안은 예상했던 대로 아담한 공간을 야무지게 채우고 있었다. 바닥에는 어딘가에서 가져온 돌무더기가 수를 놓듯 쌓여 있었고 죽은 나무를 깎아 만들었을 목재 조형물이 보물찾기를 하듯 숨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요철이 생긴 진회색 바닥과 금이 간 흰색 벽 역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있었다. 꾸미지 않고 수수한 것이 참 작가다운 곳이었다. 전시장 한쪽에서는 그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었고, 또 다른 쪽에는 작가가 작업했던 공간이 있었다. 밥은 굶어도 필름은 산다던 작가의 말처럼 조촐한 작업실이었다. 그가 사용했던 낡고 오래된 필름 카메라와 삼각대, 얼룩진 의자, 서류뭉치와 빛바랜 책들이 그대로 있어 공간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사진을 찍으러 나간 것 같이 느껴졌다. 햇살이 꼬박 들어오는 저 책상에 앉아 그는 글을 썼을 것이다. 작가는 의외로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의 사진만큼이나 나의 눈길을 끈 것이 바람에 관한 글이었다.     


나는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저 문장만으로도 작가와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제주의 바람이 무언가 다름을 나 역시 느끼고 있었다. 매섭게 등짝을 후려치다가도 이내 머리칼을 흩뜨리며 장난을 거는 제주 바람에 완전히 홀려버렸다. 그의 글을 읽으며 이제는 추억이 된 라산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주 바람이 왜 다른지까지는 성찰하지 못했는데 20년을 제주에 열중한 작가가 답을 알려주었다. 좋은 글은 멈추어 보게 된다. 그리고 나누고 싶어 진다.*      


그런데 누구와?     




폐장 시간이 되어 쫓겨나듯 나왔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다시 한번 그의 글과 사진을, 공간을 연애편지를 읽듯 정독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가... 껐다. 저어하는 이 마음은 무엇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아직 떠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별은 이렇듯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과 이별한단 말인가.


b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받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이 생각났다. 아니, 어제 그와 통화한 후로 줄곧 그에 대해 생각했다. 방금 전 바람에 관한 글을 보면서도 그를 생각했다. 왜. 어째서.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확실히 그는 나의 시선을 끌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고 단단했던 얼굴 근육이 느슨해짐을 느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다.

     

연락해 볼까. 연락해서 뭘? 뭘 하려고? 그냥, 그냥 보는 거지. 어른에게 그냥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책임지지 못할 일은 왜 벌리려는 거지? 곧 바람에 실려 보낼 감정이라고. 알아, 아는데, 아쉽단 말이지. 이대로 돌아서는 게... 


그때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마음 가는 대로 해.

     

내 안의 어린아이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자 그 아이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이 감정 자체가 소중한 거야.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 뚜-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 거지. 신호음이 뚝 꺼지며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이드였다. 그가 내 이름 뒤에 쌤자를 붙이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알았을까. 내가 이렇게 다시 연락을 하게 될 줄.     


제가 전화해서 놀랐죠?

아니요.

왜요? 왜 안 놀래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 무슨, 아직 삼십대밖에 안 된 청년이 뭐 그렇게 무던해요. 애늙은이 같은 소리나 하고.

그래요? 저 애늙은이 같아요?

나 봐요, 나. 얼마나 순수해. 소녀 같잖아요.

제가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순수하신 것 같아요.     


그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렸다.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 무슨 일이라. 내가 묻고 싶다. 무슨 일인지.

여기 김영갑 갤러리 왔다가...

두모악 가셨구나.

여기 와봤어요?

그럼요, 거기 참 좋죠. 정원도 예쁘고. 김숙자 선생님 토우랑 글도 좋잖아요. 제가 제주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글 보고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뭐? 누구? 정원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얼굴을 한 여러 토우가 기억났다. 그리고 글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좋더라고요... 글...

그죠, 홀로 그리고 함께, 제가 좋아하는 글이에요. 오늘은 어디서 묵으세요?

아... 거기요. 오늘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해서.

거기요? 거기서 주무실 수 있겠어요?

저도 걱정이에요. 약속을 한 거라서... 어제 일은 감사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식사 대접 한 번 하고 싶은데...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요? 어...     


잠시 망설이던 가이드가 말을 이었다.     


내일 일 끝나면 5시쯤 될 텐데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아요.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네, 내일 봬요.


전화를 끊고 음악을 틀었다. Victor Lundberg의 What I Really Feel. 요 며칠 반복해서 듣고 있는 곡이다. 후렴을 따라 부르는데 유리창 밖으로 갤러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자고 있던 모닝을 깨웠다. 아까와 달리 주저함이 없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마음의 정체가 드러났다.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 전문

https://www.youtube.com/watch?v=aSrqn73N3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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