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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이와 달래

by bxd Jun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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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lrx5sDWj0yI


말을 타기 위해 순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제주에 왔는데 말 정도는 타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당위감이 있었다. 앞에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녀 아이가 보호용 헬멧과 조끼를 착용하고 서 있었고 라인 밖에서 그들의 부모가 팔짱을 끼고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남매로 보였고 부모는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어려 보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역시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분이 한 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어머니, 이쪽으로 오세요.

어머니????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비춰보며 손등으로 양 볼을 쓰다듬었다.

어디를 봐서 어머니인 거지!!!

작년 일이 생각났다. 허리를 바로 세우는 데 좋대서 몇 개월 발레 학원에 다녔는데 그때 산 발레슈즈의 밑창이 더러워져 세탁소를 방문했었다. 세탁소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받아 적으며 물었다.

자제분이 발레를 하세요?

어머니 소리를 듣고도 남을 나이가 되었지만 좀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말들. 어머니, 아줌마, 사모님, 이모님. 지금과 같이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리면 상당히 따끔했다.

내가 탄 말의 이름은 한량으로 몸과 갈기가 하얀 백마였다. 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말에게도 앞머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퇴역한 말일 텐데 풀뱅이 있어 상당히 어려 보였다. 경주마가 다섯 살쯤 퇴역하니까, 말의 수명이 25년 이상임을 감안하면 정말 어린애일 수 있었다. 한량 이름처럼 느긋하게 걷다 갑자기 멈춰 섰다. 츄르륵 츄르르륵.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났다. 나를 어머니라 부른 아저씨한테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아저씨가 뒤를 쳐다고는 자신의 말을 세우며 말했다.

한량이 오줌 싸니?

내 얼굴이 굳어지자 아저씨가 한 마디 더 했다.

원래 말들은 길 가다 오줌 싸고 그래요.

내 흰색 트레이닝 복에 오줌이 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자, 이제 한 번 뛰어볼게요.

남자의 말을 따라 한량이도 뛰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3센티미터가량 공중부양 했다 안장으로 떨어지는데 꼬리뼈가 닿을 때마다 윽윽, 소리가 튀어나왔다. 똥침을 연사로 맡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안 그래도 꼬리뼈 통증도 있는데...

다시는 말을 타나 봐라.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일행이 제주 사투리를 쓰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을 보 그중 한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 기간 햇볕에 그을려 피부가 거멓고 얼굴의 뼈 윤곽이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것으로 보아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분 같았다. 아버지가 농사꾼인 나는 그을림 정도만 보아도 그가 몇년차 농사꾼인지, 어느 정도 규모로 농사를 짓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볍게 목 인사를 하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주문한 고사리 흑돼지 두루치기가 나왔다. 쌈을 싸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데 또다시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아예 내 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대놓고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먹는데 계속 신경이 쓰였다.

여자 혼자 밥 먹는 거 처음 보시나. 부담스럽네.

공기의 절반을 비웠을 때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압박감을 느끼며 한 숟갈이라도 더 떠먹기 위해서 심호흡을 했다. 혼자 여행하면서 가장 아까운 게 식비였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 때문이었다. 음식물 낭비를 절반으로 줄이면 전 세계 식량 공급량이 20% 늘어난다.* 0.7인분이 있다면 천 원 정도만 빼줘도 수요가 있지 않을까, 현대인들은 과도하게 먹는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오더니 탁 소리가 나게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달래 좀 들어요.

감사합니다, 라고 했지만 흑돼지도 남길 판에 달래까지 들어갈 공간이 위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치우지 난처해하고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멀리서 한 마디 했다.

내가 갖다 주라고 했어. 달래가 아주 맛나더라고.


맛있네요, 라고 했지만 스턴트에 길들여진 내 혀는 달래의 톡 쏘는 매운맛을 선호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잘먹는지 확인하기 위해 또다시 힐끔댔다. 가만히 보니 상대를 마주 보는 것이 어색해서 그러는 거 같았다. 평소 말이 없고 무뚝뚝한 분이 틀림없었다. 그 세대 남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런 사람이 내 주위에도 있다. 보고만 있어도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듯 숨이 턱턱 막히는 우리 아버지.


봄나물이 벌써 나왔나 보네요.
여긴 봄이 따로 없어. 항상 봄이여.
아... 그렇군요.
여행?
네.
어디서?
서울이요.
서울은 춥겠네?
네.

할아버지는 짧게 몇 마디를 건네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같이 온 일행도 나도 아직 식사 중이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리셔서 잘 가시라고 인사도 하지 못했다. 고춧가루에 버물어진 빨간 달래를 보았다. 말수가 없는 할아버지는 젊은 여자 혼자 밥 먹는 게 안쓰러웠고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 챙겨준 게 이 달래 한 접시였다. 자기표현이 서툰 자가 낸 용기였다. 흰 밥에 달래를 올려 입 안 한가득 넣었다. 알싸한 향이 올라오며 혀가 얼얼해졌다.

흑돼지는 남겨도 달래는 다 먹어야.

한 어르신이 낸 용기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b에게서 전화가 온 건 점심을 먹고 성읍민속마을을 걷고 있을 때였다.

지금 몇 시야.
일하고 있었어.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내가 필요할 땐 없고.


내 목소리에는 짜증과 원망과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 b는 피곤한 얼굴로 답했다.

바빴잖아.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됐어.
어쨌든 잘 해결된 거지? 오래 통화 못해.
그럼 왜 전화했어. 금방 끊을 거면.

언성이 높아졌다. b가 낮게 숨을 내뱉는 게 보였다. 전화를 끊으려던 b가 다시 말을 걸었다.


지금은 어디야? 하늘 되게 맑다.

궁금하긴 한 거야? 내가 매일 어딜 다니는지? 누굴 만나는지?


b가 다시 한숨을 쉬며 답했다.

들어가 봐야 돼.

됐어. 전화하지 마.
또 왜 그래.

b는 여전히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알았다, 하고는 끊어버렸다. 어젯밤 숙소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늘 이런 식이지... b가 그리울 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밧줄로 엮어놓은 초가지붕 너머로 파란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일 흐린 날씨가 계속되다 맑게 갠 하늘이 유난히 파랬다.



*플래닛 B는 없다, 마이크 버너스-리 지음, 퍼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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