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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인간

by bxd Jun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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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UKJzYJN2mAo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눈이 빨리 떠지기도 했지만 반드시 이른 아침 인적이 드물 때 가야 한다는 도민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십여분을 달려 도착한 사려니숲 주차장에는 차는커녕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사진이랑 다른데... 여기가 맞나?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안내판에는 사려니숲길 주차장(현위치)으로부터 2.5km 거리에 사려니숲길 입구가 따로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가 아니잖아!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헉헉 대는 소리가 들다. 도민은 한 달 뒤 있을 마라톤 대회 출전을 앞두고 운동 중이었다.

어, 왜.
아침 일찍 미안. 사려니숲길 주차장이 어디예요?
어? 그냥 세우면 되는데, 사려니숲길 앞에.
제가 사려니숲길 주차장으로 내비 찍고 왔거든요.
응? 거기 주차장이 따로 있나? 그냥 앞에 세우면 되는데, 갓길에.
으... 잘못 온 거 같아요.
사려니숲길 입구를 검색해 봐, 주차장 말고.

제대로 알려줘야지! 도민의 탓도 아닌데 도민의 탓을 했다. 알아보니 사려니숲길은 제주시 봉개동 비자림로에서 시작하여 서귀포시 남원읍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장장 15km의 긴 숲길이었다. 사려니숲길 하면 떠올리는 데크 깔린 삼나무 숲은 그중 일부 구간으로 정확히는 ‘사려니숲길 입구’를 뜻했다. 한 마디로 사려니숲길 입구와 사려니숲길 주차장은 엄연히 다른 곳이었다.

뭐 이렇게 헷갈리게 만들었어. 졸려 죽겠는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잘 알아보지 않은 내가 문제였지만, 누구를 탓할 일도 그리 화 낼 일도 아니었지만, 누적된 여독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마음 좀 편히 먹으라고, 그래서 누가 너랑 같이 있겠느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럴 때면 마음이란 게 편히 먹는다고 먹어지는 거냐고, 예민함은 예술가의 자산이라며 예민하게 굴었다. 결과적으로 피곤해지는 건 언제나 내 쪽이었다.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고 머지않아 후회하고 사과하고 관계가 소원해지는 테크트리의 반복.

사려니숲길 입구에 도착한 건 8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갓길에 세워진 푸드 트럭도 아직 개시 전이었다. 사려니라는 이름을 처음 봤을 때 고라니라도 사나 싶었는데, 안내문을 읽고 사려니가 ‘신성한’이라는 의미의 제주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성한 숲이라... 안으로 들어서자 빼곡히 솟은 삼나무가 일제히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사람이 없을 때 와야 한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니었다. 압도하는 자연 속에 혼자 있으려니 공포감이 엄습했다. 누군가에게 자연은 정복과 개발의 대상이겠지만 내게는 불가침의 성스러운 영역이었다. 신변을 지키기 위해 등딱지 속으로 숨는 거북이마냥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태초의 인간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주차장을 돌아서 온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태양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왔으면 진즉에 이곳을 벗어났을 것이다.

어서 빨리 사람들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엄마와 스피커폰으로 크게 통화했다. 어제 한바탕 숙소 이야기를 한 터라 엄마는 나의 안위를 걱정하며 이제 그만 돌아올 때도 됐잖아 했다. 일을 그만두고 벌어놓은 돈을 쓰며 몇 년째 글을 쓸 때도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언제까지 허송세월 보낼 거야. 다 나를 위한 충고였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남들만큼 무난하게 살기를 바랐던 엄마. 렇게 사는 것이 내게는 더 어려운 길임을 엄마 이해하지 못했다.

통화가 끝나고 숲이 울리도록 크게 음악을 틀었다. Sarah Kang의 A Thousand Eyes를 들으며 박자에 맞춰 둠칫둠칫 어깨를 흔들었다. 두비두보옴바예하바라두밤. 아무 의미 없는 스캣을 마치 악령을 떨치는 주문인양 따라 부르며 좌우로 몸을 움직였다. 누군가 본대도 상관없었다. 온몸을 무겁게 누르는 무서움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두 번 다시 혼자 숲이나 산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렴한 숙소에 묵는 일도.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이 점차 생기를 찾아가고 공기도 미세하기 따뜻해지고 있었다. 두려움도 서서히 가시며 머릿속에 상념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엄마의 인생 충고에 대해, 목적 없이 온 여행에 대해, 연락 없는 b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가이드에 대해. 같은 결의 사람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뭐라고 사과하지. 이게 뭐라고 고민이 되는 거지. 여러 번 고쳐 쓴 다음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어제의 일은 제주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내주세요. 부끄러우니까. 잠은 설쳤지만 여행은 계속되고 있으니 단단하게 버텨보렵니다.

멀리서 사람들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음악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공간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 양팔을 들어 올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숲 속 깊숙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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