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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망의 마스크

by bxd Jun 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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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8spcX4oymhU


계세요?

불이 꺼져있는 것으로 보아 안에 사람이 없는 듯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차양에 가려 건물 안은 어스름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캐리어 바퀴 소리가 건물 가득 울렸다. 검은색 페인트칠을 한 주방을 지나자 오른편에 카운터로 보이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 열쇠와 함께 A4용지 한가득 수기로 쓴 알림사항이 적혀 있었다. 예약한 2인실이 아닌 1인실 룸으로 배정해 주었으며 문제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검은색, 회색, 청록색, 남색 네 개의 방문이 보였다. 의도적으로 다르게 칠했겠지만 제각각 색이 달라 어딘지 산만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타일 바닥은 물이라도 빠지게 설계한 것인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어느 후기에선가 여관을 개조했다고 했는데 화장실이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열쇠에 적힌 번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방에 퀸 사이즈 침대가 놓여있었다.


나쁘지 않아... 그런데 이 난데없는 기분은 뭐지.

뭐랄까, 기운이 안 맞는 달까.

짐을 놓고 바로 나왔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으나 7시만 되면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해지기 때문에 그전에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도민이 준 맛집 리스트에 유명 햄버거집이 있어 지도를 검색하니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오는 중이었다. 급하게 뛰어가 버스에 올라탔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헉헉 대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버스 내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스크 미착용 시 1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아, 맞다! 마스크! 가방을 열었다. 마스크가... 없었다. 패딩 주머니를 뒤져도 없었다. 어쩌지! 일단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소매로 입을 가렸다. 어쩌자고 마스크를 놓고 온 거지. 요 며칠 모닝에 익숙해져 완전히 방심했다. 기사 아저씨가 어이 아가씨, 부를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때 버스가 정차하고 팔순도 더 되어 보이는 꼬부랑 할머니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올라오더니 내 옆에 털썩하고 앉았다. 하고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 말도 못 하고 자리를 피하기 위해 일어섰다. 할머니가 내 팔을 잡고 느릿하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요?

아뇨, 제가 마스크가 없어서요.

나 금방 내려요. 앉아 있어도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마스크.

내 거 줄게.


할머니는 굼뜬 동작으로 가방에서 천으로 된 손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정확히 사등분으로 접힌 비말마스크 한 장이 들어있었다. 비상용으로 하나씩 갖고 댕겨요. 내가 사람들 참 많이 줬어, 하며 마스크를 건네는데 애기 같이 작은 손이 꺼멓고 쪼글쪼글했다. 고생한 손은 보는 것만으로도 짠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크를 꼈다. 독한 약 냄새와 나프탈렌 냄새와 약간 찌른 내도 섞인 듯했다. 누구나 아는 냄새였다. 할망의 냄새였다.

몇 정거장을 더 가서 할망은 예의 느으린 움직임으로 처언처언히 버스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울컥했다. 할망은 너무 작고 너무 주름지고 너무 구부러져 있었다. 모질고 사나운 제주 역사를 맨 몸으로 통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모습일 것 같았다. 몸의 근력과 기력이 죄다 빠져버리고 거죽만 남은 상흔투성이의 한 인간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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