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3SzwzYpEwFE&t=27s
허허벌판에서 검은색 뿔테 안경에 카키색 야상을 입은 남자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십 년쯤 전 그러니까 그도 나도 아직 푸릇푸릇한 삼십 대였을 때 한 동호회에서 만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와의 인연은 오며 가며 인사를 한 게 전부였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니 또 반가웠다.
오빠, 똑같네. 옛날엔 나이 들어 보였는데 이제는 젊어 보여.
나 그 말 싫어해. 젊어 보인다는 말.
나의 농담을 그가 웃으며 받았다.
뭔가 로컬 바이브가 나는데?
내가 그의 외투를 보며 말했다.
오늘 바람 많이 불어서 추워. 제주에서는 이런 바람막이 필수야.
그가 큰 덩치를 움츠리며 말했다. 품이 넓은 외투 탓에 몸체가 더 커 보였다.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니?
저는 다 좋아요.
그럼, 혼자 먹기 어려운 걸 먹자. 흑돼지 먹으러 갈까?
좋죠.
이동을 해야 하니까 내 차로 가자.
네.
유명 맛집이라고 소개되어 찾아온 고깃집은 평판에 비해 한산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그는 메뉴판을 보더니 주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후 주문을 했다. 혼자 있을 때는 식사를 한다기보다 때우는 식이었는데 식도락가와 함께 있으니 뭐 먹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그는 맛집과 밥집 리스트를 구글 맵에 저장해서 다닐 정도로 먹는 것에 진심이었다.
페북 보고 어, 얘도 제주 왔구나,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네가 안 가고 있는 거야. 그래서 연락했지. 언제까지 있을 예정이야?
모르겠어요. 떠나고 싶어지면 가려고요.
너처럼 여행하다 제주도에 눌러앉은 애들 많이 봤다.
그가 고기를 굽던 집게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동작이 마치 경고처럼 보였다.
진짜? 그런 사람들 많아요?
그럼. 나도 그렇고.
평소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제주에 내려오다 3년 전쯤 아예 제주에 자리를 잡았다. 15년 가까이 해온 카피라이터 생활을 접을 만큼 이곳이 좋았다고. 처음 반년은 배낭을 메고 제주 곳곳을 누비다가 이제는 돈을 벌어야겠다 싶어 취업한 게 어느 식품가공공장이었는데, 새하얀 위생 가운과 위생 모자, 위생 부츠, 앞치마를 착용하고 일하는 그곳에서 아주머니들과 함께 하루 7시간을 들고 옮기고를 반복했다고 했다. 내가 단순 노무가 쉽지 않을 텐데, 하자, 아니, 난 너무 재미있었는데, 하며, 자신은 예전부터 블루칼라 노동자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고 했다.
특이하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예전부터 그랬어.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일하는 게 더 멋있어 보였거든. 와, 근데 그걸 내가 하고 있네! 너무 재밌었어. 잡생각도 안 들고. 땀 흘리며 일하고 집에 오면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잠이 스르르 오는데 그때 기분이 참 좋다. 노동의 신성함이라고 할까.
젓가락을 들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우리나라는 육체노동을 경시하잖아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처우도 열악하고. 급여도 짜고. 근데 그거 아무나 못하거든요. 나 같은 사람은 하루만 일해도 몸이 고장 날걸. 그런 일이야말로 돈 더 줘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됐다니까. 지금도 그 일 하는 거예요?
아니. 얼마 못했어. 한 팔 개월 정도?
왜?
장비에 머리를 찍었거든. 한동안 병원 다니고 그랬지. 이후로 이 일을 오래 하지 못하겠다 싶어서 다시 원래 하던 마케팅 쪽으로 일을 구했지. 그때 머리를 찍지 않았으면 계속했을지도 몰라. 정말 재미있었거든.
그는 산재 이야기를 아주 즐거웠던 추억을 회고하듯 말했다. 저런 이야기를 어떻게 웃으며 할 수 있지, 천성이 낙천적인 건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때요? 제주 생활은?
월급 짠 거 빼고는 다 좋아. 급여가 아무래도 육지만 못하지.
육지라니. 완전 제주 사람 다 됐네. 하하.
그럼~ 민증에 제주특별자치도라고 나오는 엄연한 제주도 도민인데.
그가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제주도민이라. 도민... 섬에 사는 사람. 그렇게 그의 별명은 도민이 되었다.
참, j도 제주 온대.
j가요? 혼자요? 언제?
응. 삼일절에 휴가 내고 온다고. 한라산 가자고 하던데?
한라산? 나도 갈래.
한라산 다녀오지 않았어?
그런데, 한 번 더 갈래.
그래.
아니, j랑 연락해요?
아니, 너랑 같아. 내가 제주도에 있으니까 온 김에 얼굴 보고 하는 거지. 사람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도민이 고기를 씹으며 눈을 씽긋거렸다. 동호회를 나오면서 j와도 연락이 끊어졌으니까 8년 정도 된 건가. 이곳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라산을 다시 보게 된다니.
정말 우연이라도 들어오고 있는 건가.
여기는 그런 게 많거든. 돈 주고 홍보하는 거. 워낙 관광객이 많다 보니.
가게를 나오자 도민은 리뷰에 거품이 끼었다고 한 마디 했다. 내가 맛있었다고 해도 최고의 고기를 대접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미식을 즐기는 도민은 먹는 데 있어서 양보가 없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
없어요. 표선면으로 넘어가는 거 말고는.
그래? 그럼 시장에 좀 갈래? 양배추를 사야 하거든.
양배추는 왜?
절이려고.
오, 그런 것도 해요? 요리 안 할 거 같이 생겼는데. 하하.
양배추 절임이 얼마나 맛있는데. 방법도 되게 간단해.
장가만 가면 딱인데, 농을 건네려다 말았다. 그 말을 했다간 너는? 이라는 말로 되치기를 당할 수 있으니까. 사십 대 싱글에게 그런 이야기는 농담으로라도 하면 안 된다.
성산오일장에서 도민이 양배추를 사는 동안 나는 장신구를 보고 있었다. 가판대 위에는 요즘 애들이 살까 싶은 유치하고 촌스러운 캐릭터 팔지와 플라스틱 반지가 촘촘히 도열되어 있었다. 귤모자와 귤머리핀, 동백꽃배지는 샀는데 아직 반지가 없었다. 가판대에 머리를 박고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뒤에서 도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사줄까?
진짜?
내가 반색하며 뒤돌아 보았다.
이 정도는 내가 사줄 수 있지.
내가 가성비가 좋아. 난 비싼 거 안 좋아하거든.
내 말에 앞에서 얼굴이 까만 가게 주인이 웃었다.
돌고래가 나아요, 당근이 나아요?
돌고래.
오케. 이걸로 주세요.
도민이 현금으로 삼천원을 지불하는 동안 가운데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인증샷을 찍었다.
반지 선물... 얼마만인지.
모닝을 데리러 협지코지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내가 바다색이 예쁘다고 하자 도민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창문을 내려 창틀에 팔을 걸치고 말없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걷혔는지 파스텔 톤의 바다가 은은하게 빛났고 파스텔을 손으로 문질러 펴 바른 것 마냥 연한 하늘색 하늘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광경이었다. 오전에 비해 느슨해진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오며 이마를 간질였다.
오빠는 좋겠다. 매일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어서.
도민이 응, 하고 짧게 답했다.
여기 와서 알게 된 건데 내가 이렇게 웃음이 많은 줄 몰랐어요. 나는 심각하고, 진지하고, 어둡고, 우울한 사람인데. 그런데 여기 와서 좀 밝아진 거 같아.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되는 환경에 있었던 거 아냐?
고개를 돌려 도민을 바라보았다. 예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표정으로 앞 유리 너머 바다를 보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 예전에 술자리에서 봤을 때는 그냥 술 마시고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저 느긋함은 여행을 많이 다녀서 얻게 된 성찰일까, 아니면 제주에 살면 철학자가 되는 것일까.
도민은 해가 지기 전에 빨래를 걷어야 한다며 가버렸다. 헤어지기 전 지역별 추천 여행지와 숙박 정보와 더불어 그가 3년간 축적해 온 맛집‧밥집 리스트를 받았다. 중요한 아이템이 생긴 것 마냥 마음이 든든해졌다. 음악을 틀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음 행선지는 표선면이었다.
돌고래 반지 넘 예뻐요^^
@Soo 꾸준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