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일요일.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어제 저녁 맥주 한 잔에 얼큰하게 취해 그대로 뻗었다. 얼마나 잤을까. 핸드폰 불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시간을 확인하니 열두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밤 12시...
아무리 잠자리가 바뀌어도 그렇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니...
제주에 오기 전날부터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충격흡수가 일도 안 되는 워커를 신고 한라산에 다녀왔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이미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도망가버렸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수분기 하나 없는 눈을 한 손으로 누르며 인공눈물을 찾았다. 두 어 방울 떨어뜨리니 그제야 시야가 맑아졌다. 음악을 틀기 위해 핸드폰을 다시 켜 보니 메신저가 와 있었다.
연락 주세요. 010-xxxx-xxxx
지난번 sns에 올린 여행 소식에 댓글로 고양이의 안부를 묻던 그분이었다. 이 분이 왜?
전화를 걸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잠자기는 틀렸고 컴퓨터를 켰다. 다음에 이동할 숙소를 예약하고 방문할 장소를 찾아보고, 일을 했다. 서울에서 일은 항상 후순위였는데 제주에서는 일순위였다. 그래야 다음날 편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부지런해졌다고나 할까. 일을 마친 후에는 내일 체크아웃을 위해 짐을 쌌다. 그리고 4시가 넘어 잠들었으니 그리 늦잠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침대에 누워 모르는 번호를 눌렀다.
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전화 통화는 처음이었다.
잘 지냈어요? 하하
어색함에 웃음이 났다.
오늘은 어디 가니? 오늘 섭지코지 가요. 그래? 그럼 이따 점심이나 할까? 네? 오빠 어딘데요? 나? 제주. 오빠도 제주예요? 언제 왔어요? 어? 나 제주 사는데. 에?????? 너도 sns를 기록용으로 쓰는구나. 나 제주 산지 꽤 됐는데. 아... 하하
민망함에 웃음이 났다.
아무튼 지금 빨래 널고 있으니까 이따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내내 말을 놓던 그가 존댓말로 전화를 끊었다.
섭지코지? 연지곤지도 아니고 말이지.
처음 들었을 땐 우리말이 아닌가 했다. 알아보니 섭지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었다. 하나는 재주가 많은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는 곳이란 의미이고 또 하나는 좁은 땅 그러니까 협지가 섭지가 되었다는 설이었다. 내게는 후자가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전자였다면 이곳에서 난 인물이 있을 텐데 안내판에 예시가 없었다는 점이 그 근거이고 당시 코지로 가는 길이 분명 좁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지는 곶cape의 제주 말이었다. 그러니까 해안 절벽을 따라 튀어나온 곳이 협지코지인 셈인데 이곳 전체로 이름이 확장된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불거라더니. 옷을 든든하게 입어 춥지는 않았지만 뻥 뚫린 바다에서 불어오는 돌풍에 머리가 산발이 되었다. 고개를 돌려 머리를 정리하자 다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내 머리를 갖고 장난을 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찔한 절벽을 따라 걷는 동안 오른쪽으로 깊고 어두운 바다가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꿀렁 대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기괴하면서도 포근해 한참을 바라봤다.
반대쪽으로는 너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옅은 갈색 털을 지닌 말 한 마리가 긴 목을 늘어뜨리고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말을 가둬둔 울타리 한편에 말 타는 곳 5천원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쟤는 퇴역한 경주마일까, 경주마는 5년이 지나면 은퇴한다던데, 다섯 살이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후 갈 곳이 없으면 폐사 처리 된다지, 인간이 참 잔인해, 그래도 제주에 왔느니 말 한 번 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선돌바위가 보였다. 용왕의 막내아들이 험악한 날씨 탓에 하늘에서 내려오지 못한 선녀를 기다리다 선 채로 바위가 되었다는 선돌. 분화구에서 용암이 올라오다 그대로 굳어서 생긴 암석에 사람들은 비극적인 서사를 입혔다.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바다를 바라보는데 한 가족 일행이 다가와 핸드폰을 건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하나, 둘, 셋, 한 번 더요, 하나, 둘, 셋, 됐습니다. 어, 잠깐만요. 핸드폰을 건네받고 가려던 가족 일행을 잡아 세웠다. 저도 찍어주세요. 그렇게 남긴 사진 속에 나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선돌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가족 일행은 자신들이 사진을 찍은 장소가 어딘지 모른 채 기념사진을 찍은 게 분명했다.
바람을 따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왜적이 침입했을 때 불을 피워 위급함을 알리던 봉수대를 지나 방두포 등대, 글라스하우스, 그랜드스윙까지 가는데 바람이 뒤에서 밀며 자꾸 머리를 흩트렸다.기분 좋아지는 바람의 장난이었다.
제주 바람이 왜 이리 좋지.
저 바람에 몸을 맡기면 날아갈 것만 같다. 그네에 앉아 바람을 쐬는데 전화가 울렸다.
나 도착했는데 어디? 안쪽으로 들어오실래요? 저도 나갈게요. 그래.
발걸음을 돌렸다. 이 분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몇 년 전 잠깐 들른 술자리에서 봤으니까 한 삼 년? 사 년?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