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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씨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43fpCvFGmo8&t=2s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이 반쯤 풀린 상태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 내부의 따스한 온기로 몸이 노곤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갈 때 쉬지 않고 떠들던 가이드는 말없이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고 남자는 입을 떡 벌리고 곤히 자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peach pit의 peach pi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치피트네요?

어, 어떻게 아세요?


왜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되려 묻고 싶었지만 알죠, 짧게 답하고는 물었다.


음악을 많이 들으시나 봐요?

제가 영화를 했잖아요. 웬만한 음악은 다 알아요. 거의 전문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지금도 집에 들어가면 항상 음악을 틀어놓고 살아요.


나도 그런데, 속으로 생각했다.


안 주무세요? 보통 돌아갈 때 다 주무시는데.


아침에 쓴 서약서 내용이 떠올라서요, 라고 하려다 졸린데 잠이 오진 않네요, 라고 했다.


침묵.


솔직히... 오늘 오기 싫었죠?

네? 아니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니, 어제 전화를 하도 많이 주셔서...

아, 제가 귀찮으셨구나?

좀... 농담이고요, 친절한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거 신청해 주신 분들은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오시는 건데.

그래도 가기 싫은 날도 있을 거 아니에요, 일인데.

그런 마음도 있긴 한데, 오늘 같이 잘 맞는 분들이랑 즐겁게 다녀오고 하면 기분이 좋죠. 또 즐거워하시니까 저도 보람 있고요. 생각보다 잘 걸으시던데요?

제가 깡다구가 있다니까요.

인정.


가이드와 나의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교차하다 사라지고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제주에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외로움도 적응이 되는 거 같아요. 이제는 일도 하고 있고. 솔직히 일하면서 많이 해소가 돼요. 일주일 동안 말 못 했던 걸 다 쏟아내는 거죠. 하하.


아침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인생소개 장면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에 한 인생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분명 나와 다르지만 교차하는 지점이 많다는 사실을 이 가이드는 알까.


또다시 침묵.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럼요.

그래서 영화는 이제 안 해요? 불편하시면 답변 안 해도 돼요.


가이드는 백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보며 대답할 건데요, 했다. 잠시 말을 고르던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영화를 찍고 있지 않지만 항상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영화를 하겠다, 하지 않겠다 규정짓지 않고 지금 보이는 것들을 하고 싶어요. 저는 트래킹으로 인생이 바뀐 케이스라, 사람들에게 트래킹을 많이 알리고 싶어요. 트래킹의 좋은 점,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그런 것들이요. 나중에 트래킹에 대한 영화를 찍을 수도 있고요.


그때 창밖으로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나타났다. 새하얀 기둥이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뻗어 있고 그 끝에 달린 세 개의 블레이드가 수평으로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십 수대의 발전기가 코 앞에서 장대한 날갯짓을 하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와... 짧은 감탄사와 함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오늘 하루 라산에 흠씬 매료되어 있었는데, 나를 압도하는 것은 자연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미래였다. 과학기술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으...


앓는 소리를 내며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타워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찰칵 소리가 몇 번 났지만 전부 초점이 맞지 않고 흔들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실망하고 있는데 가이드의 웃음소리와 함께 귀여워, 하는 말이 언뜻 들렸다.




오늘 덕분에 아주 즐거웠습니다.

내일 바람 많이 분다니까 따뜻하게 다니세요. 여행하다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고요.


가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살며시 잡았다 놓았다. 마음 한구석 뭔가 걸린 것처럼 끔거렸다. 복숭아 씨를 삼킨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그 부위를 자꾸 만져 보게 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행은 계속될 것이고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누군가와 만나고 또 헤어질 것이다. 그때마다 주저할 수는 없다. 오랜만에 말과 취향이 통하는 상대를 만난 것뿐이다. 그리고 이런 만남은 어디서든 존재한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복도를 걷는데 기분 탓인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우연이 들어올 공간을 다른 걸로 채우지 말라던 가이드와 라산의 눈안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나저나 복숭아 씨는 왜 썩어갔을까.



peach pit by peach pit

복숭아 씨가 부릅니다, 복숭아 씨


Oh peach pit where'd the hours go

When your orange skin began to glow

From a hanging branch in gardens home

오, 복숭아 씨, 시간이 어디로 가버린 거지

오렌지색 빛깔이 밝게 빛났는데

정원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 말이야


Not much is hidden underneath

A rocky heart for breaking teeth

And apple cores cyanide seed

이제는 별 게 없네

이가 부러질 것 같은 딱딱한 심장

독이 들은 씨앗만 남았지


It's been a long season through

All this rotting fruit with you

긴 시간이 지나갔지

과일은 모두 썩어갔고. 너와 함께 말이야


Lift back and see the darkness hid

Swallowed up an angled in

Looking back at sweetness dim

다시 그때를 떠올려 숨겨진 어둠을 봐

그때로 되돌아가 그 순간을 마주하지

지금은 희미해진 행복했던 기억들이 지나가


Ripe June had leaf and shady friend

The cool air is gone again

탐스럽던 6월에도 나뭇잎과 그늘진 친구가 있었지

시원한 공기가 다시 지나가고 있어


It's been a long season through

All this rotting fruit with you

긴 시간이 지나갔지

과일은 모두 썩어갔고. 너와 함께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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