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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겡끼데스까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uN0It8RFXHs&t=316s


윗세오름 대피소 안은 악천후 속에서도 눈발을 뚫고 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을 등산객들은 라면, 김밥, 김치, 햄버거 등을 꺼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고 그 바람에 건물 안이 온통 음식 냄새로 진동했다. 여기저기서 라면의 수증기가 피어올라 거대한 습식사우나에 있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을 기웃댄 끝에 겨우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수건을 꺼내 머리와 옷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땀을 닦기 위한 용도로 챙겼을 테지만 지금 딱 필요한 용품이었다. 남자가 다 쓰기를 기다렸다 슬며시 물었다. 저도 써도 돼요? 남자는 수건이 젖었다며 되려 미안해했다. 참, 예의 바른 청년일세. 얼추 물기를 닦아낸 후 축축해진 수건을 들고 다시 물었다. 이거... 제가 깔고 앉아도 돼요? 바지가 젖어서... 남자가 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고 했다. 고마워요, 하고 냉큼 깔고 앉았다. 엉덩이가 축축했다.

가이드가 챙겨 온 점심메뉴는 라면애밥 그러니까, 전투식량이었다. 국물을 다 먹어야 한대서 남자에게 라면의 절반을 덜었다. 남자는 화색이 되어 안 드세요? 했다. 입맛이 없네요. 긴장이 풀리며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보온병에서 올라오는 증기를 쬐고 있는데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며 탁탁 소리를 냈다.


추우세요? 가이드가 물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가이드가 잠시만요, 하더니 옷소매 부분을 잡고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내려갈 때는 패딩하고 우비 다 입어요.
네...

어느새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윗세오름 해발 1700M라고 적힌 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저 뒤에 백록담이 있다는데 하얀 눈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눈의 여왕이 마차를 타고 얼음성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만 같은 날씨였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더 거세졌고 가시거리는 50미터도 안 되었다. 이제 이 눈보라를 뚫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대피소에서 만세동산을 지나 사제비동산까지 2.3km에 이르는 눈 덮인 광활한 대지를 내려가는 동안 바람이 괴성을 지르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하산 중인 사람들은 상체를 숙이고 목을 최대한 움츠려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데 반해, 나는 턱을 치켜들고 허리와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세찬 바람이 뇌의 주름에 켜켜이 쌓인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을 날려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 바람에 머리도, 정신도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기다 바람에 밀려 옆으로 게걸음 치는 것 재미있었다. 바로 그때, 엉뚱한 생각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두 눈이 반짝였고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 가이드 앞에 섰다.

저 좀 찍어주세요.

핸드폰을 넘기고 새하얀 눈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외쳤다.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이렇게 웃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아니, 내가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진짜 어린아이가 된 건가. 꺄르르 꺄르르. 뒤를 돌자 가이드가 흰 이를 드러내고 나를 따라 웃고 있었다.

한 번 더 해주세요.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영화 주인공처럼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하도 웃어서 배가 아파 나는 눈물이었다.

눈꽃동산이 끝나고 가파른 경사길을 내려오는 동안 남자는 계속 자빠졌다. 혼자 아이젠을 끼고 내려왔는데 다리에 힘이 빠진 듯했다. 나는 넘어지는 대신 몸이 덜거덕거렸다. 상체와 하체가 각기춤을 추듯 제각각 움직였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팔이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내리꽂혔다가 마치 행사장 인형처럼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남자와 내가 힘들어 하자 가이드가 걷는 법을 알려줬다.

어딜 디딜지 정하고 다리를 뻗으셔야 해요. 상체에 힘을 빼고 발뒤꿈치를 살짝 들면 몸으로 전해지는 충격을 줄일 수 있어요.
네...

대답할 힘도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리막에 서서히 말을 잃어갈 즈음 처음에 봤던 목교가 나왔다. 이제 다리를 건너 언덕만 넘어가면 이곳과도 이별이었다.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정든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아쉬웠다.

정말 즐거웠는데.
다시 너를 볼 수 없겠지, 라산.

여행 오 일째. 그동안 여러 사람과 여러 장소와 만나고 헤어졌다. 만남과 이별은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그 간단한 진리를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내지 못하고 쥐고 있으려 했던가. 불침번처럼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수명이 다해 빛바랜 관계, 이루지도 버리지도 못한 꿈, 볼품없이 이름만 남은 한때의 영광. 더 이상 그것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새로 시작할 수도 없었다.


잘 이별해야 잘 시작할 수 있다.

제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잎을 잃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나무그루가 땅 밑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서서 새로이 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키 작은 조릿대가, 하늘에는 뿌연 안개가 나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최대한 눈에 담았다. 그리고 외쳤다.

라산아 안녕~ 잘 있어~~

출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행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음이 단단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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