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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라산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QWApw3QldWE


입구를 통과해 동네 뒷산 같은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내려오자 나무 데크로 이어진 다리가 나왔다. 목교 양 옆으로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모서리가 둥글어진 크고 작은 돌들이 두더지처럼 눈 밖으로 민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돌무더기 저편에 희뿌연 안개가 그 너머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쉬이 보여줄 수 없다는 한라산의 자존심처럼 느껴졌다.

다리를 건너자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서서 걸었다. 내가 앞장섰고 남자와 가이드가 뒤따랐다. 산속으로 들어오니 아까보다 더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키 작은 조릿대는 물론이고 계단도 절반가량 눈에 뒤덮여 있었다. 눈이 녹은 곳을 딛기 위해 바닥을 보며 걷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나무들이 벌을 서듯 하늘로 높이 팔을 쳐들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코끼리다리가 되어서인지 산행이 제법 순조로웠다. 콧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가이드가 내 이름을 부르며 멈춰 세웠다.


빨라요, 빨라.


뒤를 돌아보니 나와 남자 사이에 간격이 꽤 벌어져 있었다. 기다릴 겸 목을 축이고 패딩을 다리춤에 낀 후 남방을 벗어 허리에 맸다. 살짝 더운 기운이 올라왔다. 가이드가 다가와 한 마디 했다.


그렇게 걸으면 끝까지 다 못 올라가요.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가야 해요.
유지하고 있는데... 빨라요?
네.


가이드의 표정이 단호했다.


그럼 제가 마지막에 갈게요.



길을 내주고 패딩을 입으려는데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가방에 간단하게 묵는 방법이 있어요.
저 추위 많이 타서 패딩 안 입으면 추워요.
제 말을 들으시는 게...


가이드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말을 흐렸다.


하라는 대로 할게요.


패딩을 건네고 뒤로 돌았다. 가이드는 내 노트북 가방 손잡이에 패딩을 묶으며 조언 비슷하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 살짝 추워도 신체에서 발산하는 열기가 엄청나요. 정상까지 가려면 체온 유지가 중요한데,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해요.

네...

가방에 롱패딩이 대롱대롱 매달리자 남자가 먹고 있던 에너지 바를 건넸다. 나는 가방에서 귤을 꺼내 전달했다. 잠시 서서 기력을 보충하는데 뒤에서 반팔을 입은 중년 여성이 양손에 스틱을 쥐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가이드가 나를 보며 봤죠? 했다.


네...

산행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남자가 앞장섰고 가이드와 내가 뒤따랐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산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장착을 했다. 그들은 나의 귤모자를 보며 한 마디씩 했다. 모자가 참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내가 아닌 모자를 칭찬한 것인데도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절로 났다. 가이드가 이번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빨라요, 빨라.


남자가 뒤돌아보고는 멋쩍게 웃으며 왜 이러지, 했다. 내가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거 봐요, 앞에 가면 빨라진다니까요.


셋은 다시 멈춰 서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가져온 간식을 나누어 먹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이 모든 행동이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앞에서 걷는데 노랫소리가 들리던데요?


남자가 말했다.

몰랐어요? 새가 노래 불렀는데.


가이드가 내게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정말요?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저예요, 저. 그걸 또 속으시네.


내가 하하 웃었고, 가이드가 흐흐 웃었다. 남자가 아, 하 히히 따라 웃었다.


또 가야죠, 지금부터는 저희도 아이젠을 낄 거예요.


가이드는 남자와 내게 아이젠을 하나씩 건넸다. 그리곤 자신의 발에 끼우며 착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남자와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가이드의 설명을 순순히 따랐고 그 모습을 가이드가 세심히 지켜보았다.


발 좀 들어보실래요?


가이드는 남자의 양 발에 끼워진 아이젠을 하나하나 맨손으로 만져가며 모양새를 다듬었다. 그리곤 내게도 발을 들어보라고 했다. 내가 참, 친절하시네요, 하자, 가이드는 망가지면 안 되니까요, 했다. 가방에서 손세정제를 꺼내 모두의 손에 짜주었다. 가이드가 손을 코에 갖다 대며 향이 좋네요, 했다.

또다시 순서가 바뀌어 내가 선두에 섰다. 이번엔 속도에 유의하며 걷는데 순간 바람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귤모자를 잡았다. 이윽고 지금껏 바람을 막아주던 나무가 사라지고 드넓은 대지가 펼쳐졌다. 시야가 뻥 뚫리며 오로지 하얀 눈안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눈발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와~ 하하하하.


실성한 듯 웃었다. 그것은 생리현상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압도하는 장관을 마주할 때 나타나는 현상 아니, 증상. 이 증상의 이유를 알고 있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신이 나 방방 뛰고 있었다. 모자를 벗고 양팔을 벌리며 흩날리는 눈발에 몸을 맡겼다. 바람이 사방에서 강타했다. 몸이 좌우로 크게 휘청거리며 한 바퀴를 돌았다. 하하하하.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이 났다.

가이드가 뒤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나를 찍고 있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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