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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들어올 공간

by bxd May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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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Tst2_596gLw


11인승 승합차에 옮겨 탄 후 가이드는 어리목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린다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남자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럼 저부터 하겠다며 운을 뗐다.

저는 서른아홉이고요, 제주에 온 지는 이 년 가까이 되어 가고요, 제주에 오기 전에는 서울에서 영화를 만들었어요. 독립영화를 했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서 제 이십 대를 다 영화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정말 열심히 했어요. 하하. 완전히 영화에 미쳐서...

그렇게 시작된 가이드의 소개는 10분이 지나서 끝이 났다. 체감으로는 20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이건 자기소개가 아니라 인생소개였다. 한 번 보고 말 사이에 뭐 저렇게 깊은 이야기까지 하나 의아하면서도 그렇다면 나는 뭘 소개를 해야 하나 부담스러워지던 차에 남자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왔고요, 서른다섯이고, 도시철도에서 일하고 있어요. 원래는 회사에서 워크샵 왔다가 다들 돌아가고 혼자 남았는데 혼자 있으니까 좀 심심하고 외롭고 그렇더라고요. 한라산은 예전에 한 번 가봤는데 다시 가보고 싶어서 투어 신청했습니다.

가이드에 비해 비교적 짧은 소개였다. 드디어 내 차례였다. 자기소개가 이렇게 긴장되는 거였나.

저는 서울에서 왔고요, 그냥, 왔어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음... 프리랜서로 번역을 하는데 실력 있는 번역사는 아니라서 일이 막 많고 그러진 않고요. 그전에는 글을 좀 써보겠다고 몇 년 보냈고요. 뭐 그 정도?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자기소개였다. 소개를 할 때면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으면서도 나의 진가를 알아주길 바라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관심 없는 척하지만 사실 제가 좀 특별하거든요, 제게 관심 가져주세요, 하 소극적인 자기 어필라고나 할까. 섬세한 속내와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와 태도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내가 도도하고 남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편하면서 동시에 외로운 결말다.

동종업계였네요. 넓은 의미로.

가이드가 살짝 웃음 띤 얼굴을 하고 백미러로 나를 보다.

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가이드의 주도 하에 대화가 흘렀는데 대부분 가이드가 말하고 질문하면 남자와 내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가이드는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는데 직업정신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 같았다. 가볍지 않은 말투로 차근차근,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어 이야기를 끌어내는 솜씨가 상당히 노련했다. 나였다면 벌써부터 기가 빨려 등산을 포기했을 것이다. 가이드가 내 이름에 쌤자를 붙이며 물었다.

그동안 제주 어디 어디 다녀오셨어요?

구좌에서 시작해서 조천 갔다가 지금 성산에 왔거든요. 비자림, 거문오름, 성산일출봉, 광치기 해변, 귤농장 가서 귤도 따고 청도 만들고, 잠수함도 타고요...

지난 4일 동안 다녔던 장소만 열거하는데 새삼 자각이 되었다. 와, 정말 많이 싸돌아다녔구나.

많이 다니셨네요?
엄청 돌아다녔어요.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계속 뭔가를 찾아서 하더라고요.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있는 거 아니에요?

백미러를 보았다. 가이드의 옆얼굴이 잘려 보였다.

우연이 들어올 공간을 다른 걸로 채우지 마세요. 영감을 줄 상대를 분명히 만날 거예요.

정면을 보고 있던 가이드가 백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그 바람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이드가 입을 다문 채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가이드는 다시 앞을 바라봤고 나도 왼쪽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한라산에 다 와 가는지 도로의 경사가 높아지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나무를 보며 가이드의 말 곱씹었다.

우연이 들어올 공간이라고?


어리목 주차장에 도착하여 가이드에게 책가방 검사를 받고 무릎담요를 비롯한 선글라스, 선크림, 핸드크림 등의 짐을 빼놓고 최소한만 챙겼다. 등산로 입구에 서서 안내판을 보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런 거 안 보셔도 돼요.

돌아보자 가이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있잖아요.


그가 씨익 웃는데 입술 사이로 살짝 덧니가 보였다. 어른스러웠던 얼굴이 장난 끼 가득한 얼굴로 금세 바뀌었다. 혼자였다면 안내판의 설명을 다 읽었겠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가이드를 따라 지하철역에서 떼어다 놓았을 것 같은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나저나 이 분은 왜 실실 쪼개는 거지.

내가 웃기게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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