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항에는 우도에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잠수함을 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지만 배는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표소 직원에게 안전한지 물으니 기상조건보다는 바닷물의 유속과 파도의 고저가 중요하다며 흐린 날일수록 오히려 플랑크톤의 활동 저하로 바닷속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고 했다. 잠수함을 타기 위해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자 갈매기들이 새우깡을 먹으로 따라왔다.
노란 잠수함의 이름은 용궁이었다. 꼬리의 입구로 내려가자 생각보다 넓고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원형 창 너머로 엷게 푸른빛이 감도는 바다가 잠수함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바닥에는 사십여 명의 승객이 앉을 수 있도록 정강이 높이의 의자가 두 줄로 길게 열 지어 있었다.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아이들의 자연 학습을 위해 온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었다. 출입문이 닫히고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중년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의 해저 탐험을 도와줄 안내사입니다.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잠수함 양쪽에 모니터 화면이 있죠? 잠수함 위에 카메라가 달려 있는데요, 이 카메라로 바닷속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줄 거예요. 지금 화면에 잠수복 입고 서 있는 분은 우리의 여행을 도와줄 다이버예요. 이따 바다 밑에서 진행될 수중 다이버 쇼도 기대 많이 해주시고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육중한 소음을 내며 잠수함이 움직이자 내부가 웅성웅성 소란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화면 속 잠수부도 함정 위에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쿠궁 하는 굉음과 함께 선박이 기울었고 잠수부 양쪽으로 물이 들이닥쳤다. 순식간이었다. 바다가 다이버를 삼켰다. 화면 가득 시퍼렇게 바닷물이 찼고, 그 자리에있어야 할 잠수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는데 한 순간 사라져 버렸다. 잠수부가 물에 휩쓸려 사라지는 장면이 고스란히 화면에 중계되었고 내 머릿속은 그날이 오버랩되었다. 그날 제주로 향하던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나는 울었다. 아이들이 벽에 붙어 바닷속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동안에도, 가이드가 물고기의 이름을 열거하며 횟집에서 볼 수 있는 자연산이라고 농을 던졌을 때도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 왜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 어두운 잠수함 안에서 나는 왜 울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라졌던 잠수부는 물고기를 몰고 나타났다. 먹이로 유인하는 모양이었다. 잠수부가 함정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이 함께 이동했다. 이것이 다이버의 쇼였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사진을 찍어댔고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잠수부를 다시 보게 된 건 해저 탐험이 끝나고 잠수함에서 나와 다시 수송선으로 옮겨 탈 때였다. 잠수부는 잠수복 모자를 벗고 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피부가 어두운 외국인 노동자였다. 기껏해야 2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에, 이제 보니 체구도 작았다. 그녀가 어떤 사연으로 제주까지 와 잠수부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매일 하루 30분 간격으로 바닷속에 들어가 쇼를 펼치며 무슨 생각을 할까.
괜스레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성산일출봉 앞 유채꽃밭에 왔다. 2월의 제주는 아직 스산하고 추웠다. 꽃이 피기에 이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샛노란 유채꽃이 특유의 거름 냄새를 풍기며 활짝 피어 있었고, 여행객들이 여기저기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행복해 보였다. 나도 꽃 앞에서 쭈그려 앉아 셀카를 찍었다. 아름다운 꽃을 보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그곳이 일제시대 독립군을 매장하고 그 흔적을 덮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유채꽃밭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유채꽃밭에서 도로를 건너면 광치기 해변이었다. 광을 친다고? 여기서 광은 빛 광자겠지? 순간 화투패가 떠오르며 콧방귀가 났다. 혼자 여행을 하면 혼자 웃는 일도 혼자 말하는 일도 잦아진다. 어느 소설에서 혼잣말을 하는 이유가 내가 감각하는 바를 내가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혼자 웃는 것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웃음인 건가. 그렇다면 혼자 하는 생각은?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기 위해서? 생각에 고삐가 풀리며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갔다. 생각에는 끝이 없다. 저 바다처럼.
마침 간조 때여서 물 빠진 해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뜨거운 용암이 바다를 만나 빠르게 식어 형성된 검은 암반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를 푸른 이끼가 뒤덮고 있었다. 문명이 깃든 것 같지 않은 원시적인 광경이 태초의 지구를 연상시켰다. 화산 폭발이 일어난 것이 약 188만 년 전이라고 하니 적어도 백만 년 이상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멀리 성산일출봉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수천 년, 수십 수백만 년을 견뎌낸 저들이어야 했다. 누구도 저들을 함부로 손대선 안 되는 것이었다. 아득한 시간을 헤아리며 암반을 따라 걷다 보니 제주 올레길 1코스의 종착을 알리는 광치기 해변의 표지판이 나왔다.
[썰물 때면 드넓은 평야와 같은 암반 지대가 펼쳐진다. 그 모습이 광야 같다고 하여 광치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넓을 광(廣)이었구나. 설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광치기라는 말의 또 다른 유래는 관(棺)치기였다. 바람이 심한 제주에서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남자들의 시체가 해변으로 떠밀려왔고 그들의 관을 이곳에서 짜서 관치기로 불렀다가 광치기가 되었다는 설이었다. 이 아름다운 곳에 비극적인 역사가 숨어 있었다. 안내판옆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이 있었다.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마음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다. … 동쪽 끝 성산 일출봉 즉, ‘새벽 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 1948년 9월 25일(음력)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여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다. …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온 여행객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위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이곳의 이름은 터진목. 터진 길목이라는 뜻으로 지금이야 공사를 벌여 육지와 완전히 이어져 있지만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물때에 따라 육지 길이 열리고 닫혀 붙여진 이름이었다.이곳에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과 인근 구좌면 일대에서 붙잡혀온 주민들이 한꺼번에 총살당했고 그들의 피로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말하자면 학살터였다.
몇 발자국 더 들어가면 추모비가 쓸쓸히 서 있었다. 한자로 제주 43 성산읍희생자위령비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당시 희생된 성산읍 사람들의 명단이 리(里)별로 음각되어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었다. 자그마치 450여 명에 달했다. xxx의 자, xxx의 처와 같이 이름 없는 이들도 있었다. 제주에서는 한 집 걸러 한 집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낸다던데 당시 30만 인구 중 십 분의 일이 죽었다는끔찍한 역사가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이 비극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제주 사람들이 가여웠다.
발길을 돌려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날의 참혹한 광경을 바다는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연회색 하늘과 비에 젖은 바다를 보자 이 섬의 우수가 느껴지는 것 같아 가슴이 갑갑해졌다. 영문도 모른 채 포승줄에 묶여 끌려와 성산일출봉을 보며 생을 마감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심상에는 끝이 없다.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눈을 감고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걸었고 간혹 주저앉아 모래 위에 하트를 그렸다.그들은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는 가버렸다.
잠수함은 현재 선박 장비 기기 결함으로 영업 중단 상태입니다.
지난 달 잠수함을 들어 올리는 줄이 끊어지면서 바다에 가라앉았고 침몰 18일만에 육상으로 인양되었으며 다행히 당시 잠수함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13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