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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어린아이

by bxd

https://www.youtube.com/watch?v=o6EE3Qonk9I


새 숙소는 호텔이라기보다 복합 문화 공간 같은 곳이었다. 중앙에 인조잔디가 깔린 무대와 통유리창으로 안과 밖을 볼 수 있는 카페와 바가 세로로 마주 보고 있었고 그 주위를 일자형 건물 세 개가 디귿자 형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건물 상층은 객실이었고 1층에는 각종 오락시설과 기념품 가게, 세탁실 그리고 작당을 모의할 것만 같은 강의실 같은 룸이 있었다. 대학교 동아리방에 온 듯한 재기발랄한 소품과 젊은 감각의 디자인이 어우러진 요즘말로 힙 플레이스였다.

이곳에서는 각종 액티비티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재치 있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예컨대 모닥불 피워놓고 글램핑,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요가, 밤하늘 별 보기 같은 것들 말이다. 듣기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이름이었다. 또 한 가지 눈길을 끈 것이 자기다움 클래스였다. 말 그대로 나를 만나는 과정으로 일주일간 하루 7시간씩 진행되는 코스였다. 오늘 아침 공항에서 헤어진 여자가 떠올랐다. 브로셔에는 활짝 웃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는 여러 후기가 담겨 있었다. 이게 정말일까. 이것만 들으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걸까. 반신반의하면서도 호기심을 갖고 보다 가격을 확인하고 바로 접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랬다간 돈이 떨어져 일찍 돌아가야 하는 수가 있었다. 가만, 방금 뭐라고 했지?

하고 싶은 게 많았다니.

브로셔를 손에 쥔 채 그대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지한 듯 카페 안의 소음과 배경이 아득해졌다.

내 안에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낯선 곳에 무작정 뛰어들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 비를 맞으며 팔 벌려 뛰어놀기 좋아하고 자연과 인사하는 천진한 아이였다.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앞으로 지지부진한 날들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그런 노인네로 늙어갈 줄 알았는데, 내 안에 눈치 보지 않고 제멋대로인 왈가닥 아이가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영영 가버린 줄 알았던 그 아이가 내 안에 살아있었다.



조명등을 켜고 암막 커튼을 걷었다. 실내조명과 야외 LED 조명이 창문에 반사되어 안과 밖 두 공간이 겹쳐 보였고 유리창 속 나는 두 곳을 부유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꿈을 꾸는 것 같고 이곳에 있다는 사실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창 속 나는 분명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이전과는 다른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마음이 달뜨는 새벽이었다. 잠은 오지 않고 무얼 할까 하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크래프트 표지의 노트를 펼쳤다. 이 방에 묵었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기록이었다. 대개는 커플이 이곳에 머물렀고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간혹 보였다. 커플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고, 싱글은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나도 어떤 이야기를 끄적여 볼까 하다 노트를 덮었다.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일출을 보려면 빨리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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