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h9wTQ8dQtoI
제주의 밤은 도시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직 7시도 안 되었는데 사위는 깜깜했고 가게의 불은 꺼져 있었다. 백 미터 간격으로 편의점이 있는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식당에 전화를 하니 7시까지는 와야 한다고 했다. 비 오는 저녁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도로를 달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누구시죠?
수화기 너머로 중저음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라산 트래킹 투어 가이드인데요, 통화 가능하세요?
말씀하세요.
내일 날씨가 좋지 않을 거라 하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 못 가요?
내가 다급히 물었다. 한라산 투어로 숙소를 하루 더 예약해 둔 상태였다.
그게 제주하고 한라산 날씨는 또 다르거든요. 여기 날씨가 좋아도 한라산은 안 좋을 수 있고, 반대로 여기 날씨가 안 좋아도 한라산은 또 좋을 수가 있거든요. 한라산이 워낙 크다 보니까 아예 한라산만 따로 날씨를 확인해야 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같이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가이드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참을 설명했다.
제가 지금 운전 중이어서요.
아, 그럼 이따 다시 전화드릴게요.
가이드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가이드와 두 번을 더 통화했다. 한라산의 기상 조건을 예단할 수 없지만 일기 예보 상으로 악천후가 예상된다며 간다면 가겠지만 힘들 수 있다고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길게 에둘러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본인이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가이드가 또 한 번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통화했는데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저는 당연히 가고 싶죠. 그렇지만 안 되는데 무리하게 갈 순 없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예보 확인하시고 전문가시니까 판단하셔서 트래킹 힘들 것 같다 싶으면 메시지를 주세요. 결정에 따를게요.
나의 말투는 내가 들어도 단호했다. 답답함도 묻어났을 것이다. 가이드는 알겠다며 내일 5시까지 연락이 없으면 트래킹하는 걸로 생각하면 된다고 예의 부드러운 말투로 정리했다. 전화를 끊고는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좀 심했나.
설마, 내 쪽에서 가지 말자는 말이 나오길 기다린 건가.
눈치 없는 건 내쪽이었나.
몇 번째 울렸을지 모를 알람에 깼다. 눈을 감은 채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가이드로부터의 메시지는 없었지만 약속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장탄식이 나왔다. 다시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니 내 안의 어린아이가 빨리 일어나라고 성화였다. 그래,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
이불을 헤치고 일어났다. 날씨가 좋지 않다고 하여 갖고 온 옷을 전부 껴입었다. 거문오름에서 산 보라색 우비도 챙기고 전날 먹다 만 빵과 감귤농장에서 딴 귤도 가방에 넣었다. 혹시 몰라 무릎담요도 챙겼다. 시간이 없어 머리를 감는 대신 어제 산 감귤 모자를 눌러쓰고 감귤 우산을 들고 호텔 로비로 향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앳된 얼굴에 턱수염이 살짝 난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로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등산복 차림에 등산가방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 함께 하는 일행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남자가 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왔다. 그을린 얼굴과 자유로운 착장을 보니 단박에 알았다. 저분이구나. 가이드가 후드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이드는 남자와 내게 인사를 건넨 후 나를 아래로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내가 묻자, 가이드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예의 차분한 말투로 조근조근 이야기했다.
혹시 이 아이와 본인이 얼마나 오래 관계를 유지했는지 그러니까 발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얼마나 견뎌줄 수 있는지 확인이 된 상태인가요?
남자는 내 워커를 보며 말했다.
이거 안 되나요?
다른 신발 없으세요?
운동화가 있긴 한데, 걔보단 얘가 더 튼튼해요.
남자는 여전히 난처한 표정으로 내 워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이랑 어느 정도까지 걸어보셨어요?
어... 최근에 거문오름 갔으니까 한 세 시간?
남자는 두 번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만요, 하더니 내 가방을 들어보았다. 내 가방은 다름 아닌 노트북 가방이었다. 별안간 가이드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워커에, 롱패딩에, 청바지에, 노트북 가방에, 귤모자, 감귤 장우산까지 누가보아도 한라산을 등반하는 복장이 아니었다. 가이드는 골똘한 얼굴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평소 잘 걸으시는 편인가요?
어... 그렇지는 않은데, 아마 잘 걸을 거예요. 제가 깡다구가 있거든요.
가이드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뭔가 결심한 듯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출발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가이드는 남자와 내게 종이를 건넸다. 트래킹 중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 일절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어마무시한 내용의 서약서였다. 사고라 하면 낙상, 부상, 심지어 사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숨까지 걸어야 할 정도라고? 당황스러웠지만 한국인답게 토 달지 않고 서명했다. 별 일이야 있겠어.
오늘 저희는 어리목으로 해서 윗세오름에 가는 코스고요. 날씨가 좋지 않아 험난한 트래킹이 예상되는데, 제 말을 잘 따르시면 정상까지 무리 없이 갈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요. 그럼, 출발하시죠.
가이드가 앞장섰고, 남자와 내가 뒤따랐다.
생각해 보니 한라산은... 아니, 등산 자체가 거진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