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를 사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컴컴한공동주방에 스님 머리를 한 동안의 남자가 미역국 라면에 밥을 말아먹고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하며 전등 스위치를 찾자 남자가 다 킨 거라고 했다. 이게요? 형광등을 한 네 개쯤 더 설치해야 할 것 같았다. 검은색 벽이 그나마 있는 빛마저 흡수하고 있었다.
남자가 내 햄버거를 보더니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한 잔 하실래요?
제가 술을 잘 못 마셔요. 조금만 따라주세요.
맥주를 마시며 매의 눈으로 주방 내부를 스캔했다. 검은 벽에는 붙이고 한 번도 떼지 않았을 것 같은 90년대 아이돌의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 세대의 아이돌이라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진한 화장에 새빨갛고 샛노란 머리를 하고 눈을 부라리고 있어 보기 부담스러웠다.
그 말이 왜 그리 안심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나와 달리 남자는 뭔가를 해명하듯 말했다.
원래 코로나 전에는 여기가 사람이 많았어요. 여기 앞에 올레길이 있고 해서 트래킹하는 분들이 많이 왔거든요. 가격도 저렴하고... 언제까지 묵으세요? 이틀이요. 괜찮으시면 내일 술 한 잔 하실래요? 여기 장기투숙하시는 분도 계시고 몇 명 더 있거든요. 그래요.
황금냄비를 비운 남자는 안주도 없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여기 관리가 잘 안 되나 봐요. 뭐랄까, 깔, 깔끔하긴 한데 뭔가... 정리가 안 된 느낌?
남자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게 지금 사장님이 안 계셔서 그래요. 왜 안 계세요? 어디 가셨어요? 지금 깜빵에 있어요. 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 깜짝이야. 아, 죄송해요. 왜요? 모르죠, 저야.
밥맛이 뚝 떨어졌다. 가만, 제주도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살인사건이 있지 않았나. 거기가 어디였지.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지만 남자가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봐요. 표정이 안 좋아지셨어요. 아니에요. 좀 놀래가지고. 어우씨!! 깜짝이야!!!! 아우 씨...
내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니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또 왜요?
(우는 소리로) 아니... 저기 해골이 있잖아요. 저거 할로윈 때문에... 할로윈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해골이 있어요.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남자가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이후 께름칙한 분위기 속에 몇 마디가 오갔고 남자는 오늘 알바가 힘들었다며 쉬겠다고 먼저 올라갔다. 검은 주방을 떠나면서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오늘 문 잘 잠그고 주무세요, 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혼자 있으려니 입맛도 없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집이라던데... 햄버거는 절반도 못 먹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에서 접시를 물에 헹구는데 수챗구멍에 음식물이 가득했다. 언제부터 썼을지 모를 수세미는 다 닳아 희끗해져 있었다.
기운이 안 맞아, 기운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낮에 볼 때만 해도 나쁘지 않았던 방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형광등 불은 켜져 있었지만 조도가 낮아 음침했고 창밖으로 웅웅, 우우웅 바람이 기이한 소리를 내는데 마치 정체불명의 존재가 내는 울음소리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장난을 걸던 그 기분 좋던 바람이었다. 바닥은 썰렁해서 싸늘한 기운마저 감돌았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남색 수건과 같은 냄새가 나는 침구는 어딘지 찜찜했다. 십수 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영국에서 싼 값에 머문 유스호스텔 뒤가 공동묘지였다. 눈이 파란 애들은 우후죽순 솟아있는 흰색 비석이 신기하다고 사진을 찍어댔지만 내게는 홀로코스트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완전히 소멸된 줄 알았던 그날의 기억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단, 1분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밝고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너무 크지 않은 선에서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 전 호텔에서 챙겨 온 일회용 슬리퍼를 신고 벽을 훑었다. 구멍이 난 부분에 두루마리 휴지를 쑤셔 넣으며 여자 화장실에 촘촘히 박힌 휴지 구멍을 떠올렸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휴지 마감 작업이 끝난 후에는 도민에게 메시지를 보내 숙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엄마와도 통화했다. b로부터는 답장이 없었다. 뒤숭숭한 마음을 지우기 위해 노트북을 켰지만 소용없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맞다! 옆방에 여자분이 묵는다고 했지!
문을 열고 나가 옆방의 방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옆방인데요, 안에 계시나요?
인기척이 없었다. 아직 안 들어온 건가. 열 시가 다 되어 가는데? 분명 안에 있을 것 같은데... 모르는 체하는 건가. 방으로 돌아와 다시 문을 잠갔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노트를 북 찢어 쪽지를 쓰고는 다시 방문을 열고 나와 옆방 문틈에 끼워 넣었다.
206호 투숙객인데요, 괜찮으시면 잠시 이야기 나누실 수 있을까요? 쪽지 보시면, 시간 괜찮으시면 206호 방 들러주세요. 제가 좀 무서워서 말동무 좀 부탁드려요.ㅜㅜ
다시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옆방 여자의 얼굴을 봐야지만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후기 좀 챙겨볼걸... 사진만 보고 예약을 해버렸네. 이 밤에 딴 곳으로 갈 수도 없고, 왜 내일 술자리를 같이 하기로 했을까.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았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줄 알았는데... 내 안에 겁 많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런 시련을 자초하다니... 땅을 치고 있던 그 순간, 가이드가 생각났다.
여행하다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고요.
가이드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1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전화벨이 울렸다. 정말 눈물이 날 뻔한 게 아니라 눈물이 났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정말 죄송해요. 이 밤에 연락을 드려서... 일찍 주무신다고 하셨는데...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네, 괜찮아요. 사실은 여기 숙소가 좀 무서워가지고... 지금 우세요? 아니, 제가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너무 무서워가지고... 제가 평소에 겁대가리가 없거든요. 혼자서도 잘 있고, 남 신경도 별로 안 쓰고, 그런데 여기 막, 몰카 있을 거 같고, 계속 이상한 소리 나고...
가이드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아이고, 어떡해만 반복했다.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의 일은 아닌데 가이드의 목소리를 듣자 왈칵 눈물이 나버렸다.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이러지.
자초지종을 듣고 가이드가 말했다.
쪽지 그거 도로 가져오세요. 왜요? 더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가요? 딴 사람이 볼 수도 있잖아요. 제주에 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신분 세탁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그거 얼른 가져오세요. 잠시만요.
방문을 열고 옆방 문 앞으로 가 쪽지를 다시 가져왔다.
가져왔어요. 일단, 심호흡을 하시고요, 물을 많이 드세요. 미지근한 물이나 따뜻한 물을 마시는 게 좋아요. 물 있어요? 생수요. 그거를 천천히 조금씩 나눠 마셔요. 지금 마시고 있어요. 아이고... 어떡해... 그래도 이렇게 다시 통화하게 되네요.
나를 따라 덩달아 심각해졌던 가이드의 말투에 설핏 웃음이 묻어나 있었다.어이없어 웃는 거겠지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게요. 진짜 죄송합니다.
나도 민망함에 웃음이 났다.
아니에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건데.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이렇게 통화를 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대화 좀 나누니까 괜찮아진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하고요, 감사해요, 진짜. 시간 내주셔서... 또 무서워지고 하면 전화 주세요. 오늘 늦게 잘 것 같으니까. 네, 정말 감사해요.
전화를 끊고 보니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거짓말처럼 마음이 진정되었다.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에 누웠다. 침침한 조명 아래서 당황했을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이 많은 여자가 애도 아닌데 무섭다고 훌쩍 대다니 얼마나 황당했을지 생각하자 부끄러워지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일 일어나면 사과해야지.그리고 왜 그렇게 신경이 곤두서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 지쳤을 수도 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예민해져 과민하게 반응했을 수도 있었고, 공동묘지 앞 유스호스텔에서의 기억에 압도당했을 수도 있었다.
또 한 가지. 내 안의 겁 많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강한 척하지만 실은 겁이 많고 눈물도많고 위로받고 싶어 하는 여린 아이였다. 그 아이가 내 안에서 참으로 오랜 세월위로받지 못한 채 존재감 없이 혼자 울고 있었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나를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나는 나에게 무관심했고 소홀히 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