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 정각에 검은색 주방에 들어갔을 때 어제 본 남자와 또 다른 남자 그리고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화장을 진하게 했지만 지나온 나이의 피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또 다른 남자는 이 숙소의 관리인인 듯 보였다. 나를 보자 통성명을 하고 나이를 묻더니 바로 누나, 하며 자신은 37, 여자는 36, 어제 본 남자는 35라고 교통정리를 했다. 분위기를 주도하고 결정하는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어느 모임에 가든 항상 중심에서 돈을 걷고 건배사를 외치는 부류라고 할까. 구석탱이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나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어제 본 남자는 형누나와 함께여서인지 어제 나와 단둘이 있을 때와 달리 편해 보였다. 셋은 생김과 개성이 완전히 달랐는데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오랜 기간 함께하면서 쌓인 유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타박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보통의 남매였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어요?
오늘 처음 본 남자가 물었다.
다 좋아요.
곱창 먹을까요, 곱창?
제가... 곱창은 못 먹어요. 냄새가 나서.
그럼 국밥 먹을까요? 소머리국밥 맛있게 하는 데가 있는데.
국밥류는... 맑은 거 아니면 좀 힘들더라고요.
흑돼지는 먹을 수 있죠?
어제하고 오늘 흑돼지 먹어가지구...
회...
회... 먹긴 먹는데... 쯔기다시 먹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남자 친구 없죠?
네?
이 누나 손 많이 가는 스타일이네. 가리는 게 많으면 연애 못해요.
처음 본 남자가 웃으며 핀잔을 줬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평소 뭐 좋아해요?
어... 파스타? 떡볶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다.
양꼬치 어때요?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던 여자가 말했다.
좋아요!
내가 반응하자 오늘 처음 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갑시다.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에도 여자는 팔짱을 끼고 이를 탁탁거렸다. 내가 물었다.
많이 추우신가 봐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요.
헉! 그럼 어떡해요? 숙소 춥잖아요.
따뜻한데.
에? 춥던데.
보일러 온도 올리면 되는데.
보일러가 있어요?
여자가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어제 추워가지고 안에서 패딩 입고 있었어요.
어머, 오빠, 이 분 어제 보일러 안 틀고 주무셨대요.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처음 본 남자에게 말했다.
왜 그러셨어요. 남자도 놀란 눈으로 물었다.
몰랐어요...
얘기를 하지 그러셨어요.
그 생각을 못했어요.
어제는 정말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여간 손 많이 가는 스타일이야.
남자가 또다시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화양연화이라는 영화 제목의 식당에서 양꼬치 앤 칭다오를 먹으며 처음 본 남자가 꼬치꼬치 질문을 해댔다.
제주에는 얼마나 계세요.
모르겠어요.
직장 그만두셨어요?
프리랜서예요.
아~ 디지털 노마드 그런 건가? 어떤 일 하세요?
어... 번역이요.
영어?
네.
능력자시구나.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실력 없는 번역사라 일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여행도 다니는 거고...
직업을 말하는 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번역사로 잘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영어 실력을 키워 단가를 높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실력을 키우려면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정도로 이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쌔고 쌨고 시장에는 불량식품이라도 먹으려는 프리랜서가 많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이 생활을 이어 나가지만 최저임금 수준으로 언제고 잘릴 수 있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번역이라고 하면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 시선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처음 본 남자는 말이 없는 편인 내게 여러 질문을 시켜 말을 걸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내가 소외되지 않도록 눈치를 살피며 불편하지 않게 질문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었다. 남자는 제주에서 태어나 전국을 누비며 본인 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고 몇 년 전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고 했다.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이곳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부딪혔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분위기를 리드하는 구력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문경에서 왔다고 했다. 지난 일주일간 제주에 여행을 왔다 이곳이 좋아서 눌러앉게 되었다는 사람을 여럿 만났는데 여자도 그중 하나였다. 뭍에 계신 부모님은 하나뿐인 예쁜 딸이 멀리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스스로도 안정된 직업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어 고향으로 되돌아갔지만 얼마 전 장고 끝에 이곳으로 다시 내려왔다고 했다.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느냐고 했더니 당분간 식당에서 설거지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손을 보고 고와 고와, 딱 고생 안 해본 손이야 했다. 앳되고 예쁘장한 얼굴이 그때만큼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어제 본 남자는 6년째 제주살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연히 이 게스트하우스와 인연을 맺었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았고 어쩌다 보니 아예 눌러앉게 되었다. 3년 전 호기롭게 창업을 했다가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고 졸지에 빚을 떠안으면서 지금은 빚을 갚아나가기 위해 광치기 해변에서 하루 8시간씩 말 끄는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하루빨리 성공해서 돌아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얼굴에 아직 소년기가 남아서인지 유독 해맑아 보였다.
어제 문 잘 잠그고 주무셨어요?
어제 본 남자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아...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처음 본 남자가 어제 본 남자에게 물었다.
아니, 어제 내가 그 얘기를 했거든. 그 형 얘기.
아~
처음 본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랬더니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시더라고.
사실...
어제 일을 이야기하며 옆방에 남긴 쪽지 사진을 보여줬다. 내가 울었다고 하자 여자는 어머, 하며 건조한 손으로 입을 가렸고 어제 본 남자는 입을 떡 벌리고 정지된 상태로 하하 했다. 어이가 없어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처음 본 남자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일부러 생각해서 일인실로 옮겨준 건데. 여기가 올레길이 있어서 오시는 분들이 좀 땀 냄새도 나고 코도 골고 그래요. 그래서 특별히 일인실로 바꿔드린 거거든요. 아이 참, 그런 일이 있으면 전화를 좀 주시지.
갑자기 술기운이 올라오며 낯이 뜨거워졌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생쑈를 했다니...
그런데 그 소리는 뭐예요?
내가 물었다.
무슨 소리요?
이상한 소리가 나더라고요.
뭐지? 무슨 소리가 나지?
셋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창밖에서 막 기분 나쁜 소리 못 들으셨어요? 밤새 들리던데.
아, 거기 뒤에 대나무숲 있잖아요. 그건가? 그건가 보네.
어제 본 남자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
아이구, 전화를 하시지. 이 누나 진짜 손 많이 가네. 그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라고 그래요.
처음 본 남자가 걱정과 농담이 섞인 억양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이것만 해 오신 거 아니에요?
어제 본 남자가 키보드 자판 치는 흉내를 냈다. 그 타이밍이 절묘하여 나도 그들도 같이 웃었다.
모든 오해가 풀렸다. 어제의 일은 그저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들을 따라 웃었지만 사실은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들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활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따뜻한 온실 속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는 화초가 나였다. 온실 밖에서는 맥을 못 추는 허약하고 나약한 화초. 처음 봤을 때 셋에게서 느꼈던 공통점은 녹록지 않은 인생을 감당해 나가면서도 희희낙락 유머를 잃지 않은 삶의 태도였다.
그들에게는 야생초와 같은 단단하고 강한 생명력이 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사정없이 몰아치는 제주 바람을 견디며 뿌리내린 강인한 야생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