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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즈 Mar 22. 2023

사회에서 제시하는 '정상성'이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7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김초엽 소설.
그중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수록되어 있다.

 각자 다른 주인공이 다른 상황에 처한 7개의 단편 소설이긴 하나 내가 생각한 주제의식은 동일했다.

 "인간에게 '정상성', 사회에서 받아들이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권리란 무엇인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소수자를 대표하고 있다. 장애인, 여성, 인종, 이주민, 비혼모를 비롯한 모든 세상의 소수자들이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여러 사례를 보여주며 생각거리를 준다. 그리고 정상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존재들은 과연 누구이며 그 '정상성'이라는 범주는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현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부조리와 차별,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제도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7개의 각 단편소설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구절들을 기록하고 나의 생각을 덧붙였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사실 정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자문하는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생각하고 직시하여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길 원하는 바다.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었을 뿐 (중략) 세상이 원치 않았던 존재로 태어난 릴리. 세계에서 배제된 릴리. 그러나 악착같이 살아남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가능성을 입증한 릴리 다우드나. (중략)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였다.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결국 릴리는 나에게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지 못했다. 그건 릴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中 -

 

 '배제당하다'. 집단에서 배제당한다라는 기분은 한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박탈감을 주는가. 세상에서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배제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소속되길 원한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서로 엮고 엮이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공존하여 살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며 살아간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소속에서 인간이 배제당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사회에 어떤 의미일까. 소속당하고 싶으면서도 배제당하지 않으려 누군가를 배제시키고 하는 아이러니는 왜 생기는 것일까. 공통점과 공감대로 묶어 있길 원하면서 조금의 다름도 포용하지 못하고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불가란 이유로 혹은 위협적인 존재라 근거 없는 추측으로 배제해 버리는 사회. 배제시키는 방법은 잔혹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위계의 층계를 나누고 정상성과 우월함을 단정 시키는 교만함의 끝을 보았던 것이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상성을 주장하며 사회에서 큰 무리가 된 사람들이 본인들의 위치가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상대들에게 비정상성이라고 부여하며 배척의 대상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건 인간이라고들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광대한 우주에서 고독한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조우를 갈망하는 그 자체가 고도의 자기 인지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일까.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 스팩트럼 中 -


 이해 불가능한 존재에서조차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살기 위한 극한의 상황이라서 그럴 수도. 그렇다면 비록 내가 지금 살만하더라도 살기를 발버둥 치고 있는 다른 한 편을 옹호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자. 이해 불가능한 존재조차도 상대를 이해하고자 찬찬히 살펴보면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느낄 테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인간 밖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인간을 비인간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들이라면.

- 공생가설 中 -

 

 윤리성과 도덕성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닌 학습과 교육을 통해 주입되어 내재화된 특성 일수도. 그렇다면 로봇도 인간화가 가능하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

 

 급변하는 시대에서는 그 어떤 것도 불변의 진리란 없다. 모든 상황과 절대적인 거 같은 방법도 순식간에 쓸모없음으로 바뀔 수 도 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내일은 가장 비경제적인 방법이 되기도 한다. 비교적 도달할 수 있고 잡힐 것 같은 것도 언제 먼 우주가 되어 다시는 가지 못할 곳으로 변할 자 모른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우린 무엇에 그리 매달리며 절대적으로 절실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떤 희망을 바라보고 인간은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에는 인간의 기술로 넘지 못하는 불가능한 한계라는 것이 있다. 모든 건 탄생과 죽음이 있는 것처럼, 우주의 별이 그러한 것처럼, 인간은 우주 안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나아가지 못한다 해서 그 반대의 의미가 정지, 도태는 아닐 것이다. 아무런 목적의식도 목표의식도 없이 말 그대로 현실에만 순응하며 상황과 환경에만 나를 맡기고 아무렇게나 살 순 없지 않은가. 사는 동안은 우리는 각자 본인의 삶을 자주적으로 살아갈 책임이 있다. 외부의 조건에 이리저리 휘둘리기 시작하면 나의 인생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나를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숱한 변화와 혼란 속에서도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으로 소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뭐가 돼도 좋다. 적어도 신념라는 이름으로 나의 삶을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각자만의 목적지를 희망으로 두고 살아가자.


우리가 소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오직 감정 그 자체였던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가? 의미가 배제된 감정만을 소비하는 것은 인간을 단순히 물질에 속박된 동물로 전락시키는 일이 아닐까? 애초에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조차도 궁극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않은가?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 감정의 물성 中 -

 

 리가 우리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정을 통제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고 원치 않다면 멈출 수 있다면.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 본인이 결코 원해서 그러한 감정을 일상처럼 분신처럼 껴안고 살아가진 않을 테다. 정상성의 개념에 비추어보면 우울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정상적인 감정이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우울감을 배제하려는 노력보다 그 정상적인 감정인 '우울'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중요할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자체가 내 안의 감정을 해소할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불안과 우울, 두려움은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아 더 나를 힘들게 만든다. 눈물과 같이 아니면 이 소설에서 나오는 돌멩이와 같이 물성으로 그 성질을 파악할 수 있는 나만의 물성을 만들어 적절하게 이용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 관내분실 中 -

 

 나를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그것이 내가 지니고 있는 내 소신과 신념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소신과 중심들로 채워나간 나의 인생들. 내가 만들어낸 창조물들. 나의 에너지와 노력이 깃든 과정과 그 과정에서 비롯된 숱한 결과들. 나를 붙잡아줄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의한 행동들로 삶이 나를 어떻게 흔들지라도 멈추지 말자.


재경은 수많은 소녀들의 삶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최후에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재경이 바꾸었던 숱한 삶의 경로들이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 가윤이 바로 그 증거 중 하나였다. 가윤은 한때 재경을 보며 우주의 꿈을 꾸던 소녀였고, 이제 재경 다음에 온 사람이 되었다.

-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中 -

 

 나의 모습이, 행동과 말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영향을 끼치게 될 지모른다. 그 모습이 비록 실패와 고통이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는 희망이며 위로고 교훈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삶은 어떠한 이유로든 의미가 있고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살자. 나를 위하지 못하더도 꿈이 될 수 도 있는 한줄기의 빛을 위해 열심히 살아내자. 그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 될 것이다.


  SF소설을 읽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끊임없이 쫓는 과정이 좋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어쩌면 앞으로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계 혹은 인간과 외계의 공존과 공생을 위해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발전시키느냐는 결국 인간의 몫이겠지만. 인아영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우리는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오랫동안 잊혔던 존재를 떠올려 볼 수도 있고,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존재들에게 각기 마땅한 가치를 부여해 볼 수도 있으며, 과학기술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알려주는 세상을 꿈꿔볼 수 도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다양성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알며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하면서 사람과 사물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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