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 가야겠다.
24년 3월 19일. 사망하셨습니다.
서글픈 곡소리도, 조잡한 기계음도 없다.
그저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 누군가 출근길에 사 온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어쨌든 나는 나의 청춘에게 오늘 사망선고를 내렸다.
딱히 별 이유는 없었다.
사무실 한편에 자리 잡은 식물을 보다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내리쬐는 햇볕이나 바람, 그 흔한 관심도 없이 간신히 그 모습만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 마치 나의 청춘과 비슷한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실 청춘이 빛나지 않은 일은 비단 오늘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전에 빛이 바랬지만 이제 와서야 선고를 내린 것뿐이다.
어제도, 그리고 저번주에도, 하물며 몇 달 전에도 같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 같은 일만 하고 있던 사이 나의 청춘이라는 것은 조용히 빛을 잃어 갔을 것이다.
주말에도 휴식을 취하겠다는 핑계로 집에만 박혀있었으니 꺼져가는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조차도 유튜브와 넷플릭스에게 밀려났으리라.
사실 청춘이 끝나버렸다는 것이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눗방울이 영원히 터지지 않기를 바라던 마음은 이미 사라졌고 나는 가지 않을 줄 알았던 군대도 진작에 다녀왔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살 마저도 이미 3개월 전에 지나버렸다.
눈가의 주름과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체력이 내가 남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세상 모두가 특별하다는 말이 이제는 모두 특별하지 않다는 말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죽어버린 청춘을 끌어안고 울고만 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나라고 별 수 있겠나.
잠시 눈을 감고 미리 타놓은 녹차를 홀짝이며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짧은 묵념의 시간 동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사망선고.
그다음은 뭘까.
고인이 되어버린 청춘이가 가장 빛나던 순간을 영정사진으로 걸어두어야지.
언제였을까.
찬찬히 지나가던 과거들을 떠올려 본다.
수많은 기억들 중 가장 빛나는 기억.
가장 아름답고 가장 밝았던, 가장 빛이 났던 순간들.
어쩌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청춘이라는 단어의 완벽한 시각화를 알고 있으니까.
내리쬐던 햇빛,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 이름보다 더 푸르르던 강물, 눈을 맞추면 꼭 웃어주던 사람들, 더운 날씨 탓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시원한 병맥주, 길을 따라 흘러가던 카약,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바위산…
나의 빛나는 청춘은 그곳에 있었다.
라오스.
2019년 2월.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나는 라오스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당시 인기 있던 예능인 “꽃보다 청춘”이 그 시발점이었다.
그 주인공들이 방문했던 나라인 라오스. 그 때문에 라오스가 동남아 인기여행지로 급부상했었다.
나 역시 그들의 방문기에 매료되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였으니.
예능의 이름도 꽃보다 할배가 아닌 꽃보다 청춘이었다.
마치 청춘들을 위한 여행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25살, 완연한 청춘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우리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떠나야 할 듯한 기분이었다.
홀린 듯 라오스행 티켓 3장을 예매했고 그저 기대만을 잔뜩 품은 채로 라오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 5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라오스는 우리가 입고 갔던 패딩이 쓸모없다고 느껴질 만큼 뜨거웠다.
놀라운 것은 그 뜨거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먼저 눈가에 미소를 띠었고 함께 웃어주면 이에 질세라 더 밝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흘렀지만 싫지 않았다.
햇빛이 피부를 뜨겁게 달궜지만 그늘로 숨고 싶지 않았다.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버기카로 힘차게 달리며 바라본 풍경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집라인을 타고 숲 속을 가르며 지나다니던 것은 또 어떻고.
하늘만큼, 어쩌면 하늘보다도 더 푸르던 블루라군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던 것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보이는 듯하다.
다이빙을 하는 이를 모두 함께 응원하고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던 순간은 이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한다.
가장 빛나던 나의 청춘.
그 순간에는 그저 즐거울 뿐이었는데.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안다고 하던가.
청춘이라는 시기는 꼭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가장 밝고 아름답게 빛나던 청춘이었구나.
그리움과 씁쓸함이 함께 밀려들어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
나의 노스탤지어.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가엾은 청춘을 한 번만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쩌면 잃어버린 그것을 그곳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곳에 다시 갈 수는 있다.
그때만큼 빛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곳에서는 잔뜩 쌓여버린 먼지를 조금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라오스에 가야겠다.
무모하고 걱정 없던, 꿈만 많고 겁은 없었던, 그래서 빛이 나던 그때의 내가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
눈앞에서 누렇게 마른 잎 하나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식물을 보며 다짐했다.
라오스에 가야겠다.
나는 화분이 아니니까.
땅에 박힌 뿌리 대신 자유로운 두발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