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_아이를 대하는 방법

마음이 만나는 순간

by 한경환

숙소에 도착할 때 즈음, 비는 온전히 그쳤다.

아직은 구름 사이로 해가 보이지 않았지만 구름 뒤에서 빛나고 있는 해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었다.

따사로운 아침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뜨겁지 않은 아침이다.

숙소가 자리 잡은 길은 이미 익숙해진 풍경들이었지만 어딘지 모를 낯섦이 공존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가 한데 섞이며 또 다른 하루를 열어가는 듯했다.


숙소에 도착해 머리의 물기를 털고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옷에는 조금 전의 순간을 품었던 비와 그 향기들이 단추 사이사이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몸은 조금 젖었지만 마음만큼은 묘한 따뜻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일찍 일어난 세희는 왜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냐며 장난 섞인 원망을 보냈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장난스럽게 뱉은 말이었지만 아마도 언젠가는 지켜질 약속 같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 분명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루앙프라방은 그런 곳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그대로 있을 것 같은, 언제든 돌아와도 변하지 않을 그런 곳.

이건 비밀이지만 나는 꽤 감이 좋은 편이다.


이제 슬슬 아이들을 깨울 시간이다.

오늘의 일정은 미리 예매해 둔 기차시간 전까지 여유롭게 루앙프라방을 구경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게 늦게까지 잠을 자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아직 눈비비기가 한창인 민아와 민정이를 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조식 제공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이라 그런지 우리를 제외하고는 한 팀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외국인 커플로 보이는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각자의 노트북과 아이패드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바닥에서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던 꼬마아가씨가 우리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오래된 메뉴판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수줍은 미소와 홍조를 띤 얼굴로 곧장 강아지에게로 달려가 다시 쓰다듬어주기를 시작했다.

메뉴는 간단했다.

메뉴판 속 사진 4가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다.

구성은 같았지만 계란이 오믈렛인지, 프라이인지, 스크램블인지, 날계란인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취향대로 메뉴를 골라냈다. 나는 스크램블을, 세희는 오믈렛을 골랐다.

민아와 민정이 것이 먼저 나오고 차례로 우리 것이 나왔다.

메뉴도 취향 것, 먹는 방법도 취향 것이었다.

누구는 따로따로 누구는 반미처럼 빵에 재료들을 몽땅 넣어서 먹었다.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 즐기는 식사 시간.

직접 만들어 먹는 반미.

그리고 갓 나온 접시들이 식탁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서투르게 달리는 소리가 그 위를 따사롭게 덮어주었다.

비를 맞으며 걸었던 새벽의 기억은 온전히 내 것이 되었고, 이른 아침의 풍경은 조금씩 새로운 하루를 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루앙 프라방의 아침은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나만 아는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는 못했는지 오랜만에 제법 조용한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덕분에 옆 테이블에서 오고 가는 나지막한 대화와 아이의 웃음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수줍은 듯 메뉴판을 건네고 도망치던 아이가 우리의 옆 테이블의 외국인 남자와는 꽤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모국어가 아닌 서툰 영어를 이용해서 말이다.

단어를 하나씩 골라가며 조심스럽게 문장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잊은 듯 작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대화 속에는 분명 활기가 있었다.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고, 좀 전의 수줍음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궁금했다.

그토록 수줍어하던 그 소녀가 어떻게 저리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외국인 남자의 태도에 답이 있었다.

그는 소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자신의 아이패드로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소녀가 말을 시작하면 손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맞추고,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귀 기울였다.

마치 소녀의 작은 목소리와 서툰 영어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듯이.

그가 소녀에게 보여준 것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심 어린 존중이었다.

아무리 바쁜 상황에서도, 그는 그녀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는 그의 태도 속에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 온전한 집중과 눈 맞춤, 따스한 시선이 소녀의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속에서 이런 순간들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간다.

나 역시 누군가의 이런 시선과 태도 속에서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겠지.


우리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거창한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는 작은 태도에서 시작한다.

마치 그 남자가 보여준 것처럼.

아, 이또한 청춘일 것이다.

바로 이런 순간들로 빛이 나는 것이.

청춘은 단순히 젊은 어느 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알고 있다.

그것은 마음이 빛나는 순간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려는 작은 시도 속에서 피어난다.

비록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도, 우리가 누군가와 진심으로 연결되고, 서로를 바라보며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여전히 청춘의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수줍은 소녀에게도, 아이와 눈을 맞추던 외국인 남자에게도, 그 순간은 각자의 빛나는 청춘이었던 것처럼.

아침의 햇살보다 따스했던 그 장면은 오랫동안 나이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종종 그 소녀의 웃음과 그 남자의 시선을 떠올리며, 사람 사이의 마음이 닿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되새기게 될 것이다.


고작 반미 반쪽을 먹었을 뿐이지만 배가 불렀다.

빵보다 더 든든한 마음을 보았으니.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이제는 다들 짐을 풀고 싸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끝이 났다.

민정이와 세희는 벌써 짐을 다 싸놓고 인생샷 건지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쩔 때 보면 어른스럽다가도 이럴 때는 또 아이들 같다.

어쩐지 유치해 보이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옷을 넣고 캐리어를 닫았다.

짐을 다 싸고 나니 아침의 햇살이 구름을 제치고 방 안까지 들어왔다.

여전히 청춘은 순간순간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는 건 결국 우리의 몫일 것이다.

청춘의 한 장면을 사진에 담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사진을 찍고 있는 민정이에게 다가가 한마디 건넸다.


“다 찍었으면 나와, 내 차례야.”


인생샷은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