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_TWO LITTLE BIRDS

뜨거운 태양 아래를 함께 걷는 일

by 한경환

고작 하루였지만 꽤 정이 들어버린 방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를 마시던 바닥, 걸터앉아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던 난간, 블루라군의 물에 잔뜩 젖은 수영복들을 털며 줄줄이 늘어놓던 테라스…

무엇하나 반짝이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이 모든 순간들을 뒤로한 채 작게 삐걱거리는 문을 닫았다.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 너머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순간들 또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새 정들어버린 숙소를 뒤로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Two little birds”라는 카페였다.

어젯밤에 함께 찾아본 음식점 중 빈티지하면서도 비건들을 위한 카페였다.

루앙 프라방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밖의 날씨는 해가 쨍쨍했다.

아침에 비가 왔다는 나의 말이 젖은 셔츠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과 오전치 햇빛까지 뿜어내려는 양 내리쬐는 햇살이 여름을 실감 나게 했다.

아, 동남아의 여름이란.

우리는 나무 밑의 그늘을 따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시골마을 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결코 지루한 풍경이 아니었다.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익숙한 듯 햇빛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 색색깔의 액체가 들어있는 통을 늘어뜨려놓고 음료를 파는 상인들.

이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조용한 드라마 같았다.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호수 같은 일상들.


뜨거운 태양 아래 흘린 땀과 걸어온 걸음에 배가 고파졌다.

다행히 꼬르륵 소리가 커지기 전에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픈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앉아있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현지인들이 아닌 여행객들이었다.

여행객들에게 인기 많은 곳이라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우리는 가장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도 라오스의 여느 가게들처럼 에어컨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테이블마다 선풍기가 하나씩 있었다.

우리가 짐을 두고 앉자 점원이 꼬깃 꼬기 한 메뉴판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요거트볼 2개와 아보카도 토스트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담장, 키가 큰 야자나무, 이름 모를 넝쿨성 식물들, 오래된 나무를 이용해 만든 간판.

자연에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오래된 친구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주문한 음식은 라오스의 여유를 닮아 느긋하게 나왔다.

신선한 아보카도와 견과류를 듬뿍 올린 토스트가 먼저 테이블을 채웠고 잠시 후 나무 그릇에 담긴 요거트 볼 2 접시가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 올라왔다.

비주얼은 합격.

이제 맛을 볼 차례다.

먼저 요거트를 잘 섞어 한 입 먹어보았다.

상큼하고 시원한 요거트의 맛이 루앙 프라방의 날씨와도 잘 어울렸다.

과일들이 뿜어내는 청량함이 이곳의 더위를 잠깐이나마 잊게 해주는 것 같았다.

나무 숟가락의 은은한 나무향이 함께 느껴졌다.

이번에는 토스트를 먹어볼 차례.

누군가 4등분으로 예쁘게 잘라놓은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아보카도의 부드러운 향과 고소한 통밀빵.

그리고 가장 위에 올라가 있는 견과류들이 차례로 씹혔다.

어딘지 심심하면서도 고소함으로 꽉 채운 맛이었다.

루앙 프라방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여유가 넘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큰 소음 없이 잔잔한 바람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바람이 비어있는 자리에는 햇살이, 햇살이 닫지 못하는 곳엔 그늘이 자리 잡았다.

쿵쿵 소리와 빵빵 거리는 소음이 모두 사라진 이곳은 술 없이도 나를 취하게 했다.

이곳의 유일한 소음이라고는 이미 비어버린 그릇을 긁어먹는 민정이의 숟가락 소리뿐이었다.

나른하다.

바람마저 햇살에 지쳐 느릿느릿 흘러간다.

아, 너무 더운 날씨다.

녹아버린 치즈처럼 카페 테이블에, 의자 위에 늘어졌다.

잠깐 이대로 있어도 좋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아도 될만한 핑계로 딱 좋은 날씨이니까.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어디선가 떼어낸 구름 한 덩이가 느릿느릿 지나간다.

누군가에게는 내리쬐는 햇빛을 막아줄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때마침 카페 안은 점차 손님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일어날 타이밍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 같았다.

우리 몫의 음식을 계산한 뒤 카페를 빠져나왔다.

시계는 오후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을 시간이다.

여름의 동남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

목적지를 향해 걸을수록 말수가 줄어들었다.

늘 재잘재잘 말이 많던 민정이는 더위에 가장 취약했으므로 목소리를 잃은 지 오래다.

각자의 손에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작은 손선풍기만이 우리들의 침묵을 덤덤하게 채워갔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길게 뻗은 도로에 지칠 법도, 피할 곳 없는 태양이 따가울 법도 한데도.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방울이 이내 뺨을 타고 흘렀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고 나니 손바닥도 끈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까지 더운데도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덥고 다리도 꽤 아팠지만, 그런 서로를 보며 피식 웃고 마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는 묘한 생기가 있었다.

청춘이란, 때때로 이렇게 무모하게 태양 아래를 걸어가는 일이 아닐까.

어드로 가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때론 조금 힘들더라도, 함께 걷는다면 견딜 수 있고 웃을 수도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청춘이라는 시기가, 그리고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하늘에는 구름들이 솜사탕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출발할 땐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던 태양이 구름 뒤에 숨어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저 멀리 반짝이는 우리의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더위도, 이 걸음도 결국은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걸었다.

땀을 닦아내면서, 가끔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엔 서로를 보며 웃으면서.

그리고 드디어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인다는 안도감과 함께 지금까지의 더위도 땀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길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걷는 동안엔 힘들고 지겹다가도, 다 와서 뒤돌아보면 꽤 괜찮았던 순간으로 남는 것.

나중에 이 시간을 떠올리면, 우리는 분명 “그땐 진짜 더웠지.”라며 웃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한번 그렇게 무모한 길을 함께 걸어보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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