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_왕의 흔적

왕이 머물던 공간, 우리가 머문 순간

by 한경환

라오스의 해는 천천히 그러나 뜨거운 숨결처럼 내려앉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기가 마치 투명한 막처럼 피부 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무더운 공기가 폐 속 깊이 스며들었고 마른 흙과 햇살의 향기가 그 안에 섞여 들어왔다.

햇살은 바닥에 길게 누워 열기를 남겼고, 우리는 더위에 지친 걸음으로 문을 넘었다.

그리고 시간을 가두어 둔 듯한 정적이 우리를 맞이했다.

붉은 지붕, 우아한 황금빛 장식들, 한때 이곳을 거닐었을 왕들의 발자취.

햇빛을 품은 유리창이 반짝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일렁이는 듯했다.


왕궁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선선한 공기가 더위로 달아오른 몸을 감쌌다.

발아래 바닥은 오랜 세월의 발자취를 품은 듯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고, 벽마다 고요히 스며든 오래된 이야기들이 금빛 그림자로 일렁였다.

세월을 품은 계단마다 피어있는 이끼들에서 시간이라는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금빛으로 장식된 지붕들은 마치 여전히 왕이 머물고 있는 듯 고요한 위엄을 품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십 년 전 이곳을 거닐었을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문득, 시간이 멈춘 공간 속을 떠돌고 있는 듯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왕이 살았던 왕궁답게 아름다운 정원이 눈에 띄었다.

그 정원 가운데 호숫가에는 서로 같은 옷을 맞춰 입은 아이들이 있었다.

흰 셔츠와 남색 치마, 순수한 웃음.

아이들은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사진을 찍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웃음을 터트리고 뜨거운 태양빛에서도 무엇보다 더 밝게 빛이 났다.

젊음이란 그렇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난다.

햇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환하게 퍼지고 바다처럼 푸르고도 자유롭다.

때로는 잔잔히 머물러도 그 자체로 찬란한 것.

하지만 청춘은 그저 나이가 주는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여행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청춘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가짐인 것이다.

젊음은 한순간이지만, 청춘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언제든 다시 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천천히 그늘을 따라 걸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어두워지더니 순식간에 비가 쏟아졌다.

동남아의 우기란 이렇듯 갑작스럽게 시작된다.

그토록 맑던 하늘도 한순간에 비를 쏟아낸다.

하지만 우리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금세 맑아질 것을 알고 있으니까.

비를 피해 잠시 커다란 나무 아래에 함께 뛰어들었다.

우리는 가만히 내리는 비를 구경하며 자리를 찾아 앉아있었다.

어느새 민정이는 멀찍이 떨어진 연못가에 혼자 쪼그려 앉아있었다.

곧 민정이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돌아보며 작게 소리쳤다.


“여기 네잎클로버가 엄청 많아!”


하나, 둘, 셋…넷..!

세어보니 정말 네 잎이었다.

꽤 많은 네잎클로버가 쉬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다 함께 연못가에 쪼그려 앉아 클로버를 찾았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작은 잎들.

우연히 마주친 행운.

비가 오지 않았다면 마주칠 수 없었을 행운이다.

행운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간절히 찾아 헤매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우리가 그저 고개를 숙이기만 해도 발밑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

어떤 날에는 스스로 찾아올 때도 있을 것이고 혹은 갑자기 내린 비를 타고 올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소중하게 모은 네잎클로버들을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여권 사이, 지갑 사이, 작은 메모장 사이.

가방 속으로 사라지기 전, 민정이는 한참 동안 클로버를 들여다보았다.

우연히 만난 행운을 좀 더 오래 보고 싶다는 듯이.


우리가 들어온 입구 옆에도 법당이 하나 있었다.

호파방이라는 이 법당에는 루앙 프라방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황금 불상 파방(Pa-Bang)이 보관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신발을 벗으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헝클어지지 않게 가지런히.

맨발로 오르는 계단,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바닥이 발을 간질였다.

조용한 공간, 낮은 목소리.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황금 불상 앞에서 우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사이로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모아진 두 손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다 함께 올라왔던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여전히 뜨거운 바닥이지만 아까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근데 민정이는 소원을 왜 이렇게 크게 말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민정이는 보나 마나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뭔 소리야, 나 속으로 말했는데…”


“야야, 아주 쩌렁쩌렁 울리더라.”



웃음기 섞인 세희의 말이었다.

우리는 한바탕 웃으며 신발을 신었다.

밖은 여전히 뜨거웠고, 공기는 그대로 무거웠지만 그날 나의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도 흐릿한 한낮의 꿈처럼, 마치 해 질 녘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 같은 기분.

시간 속에 고요히 머물던 왕궁은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도 잔잔한, 그러나 선명한 그림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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