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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ctor flotte May 10. 2024

시간에 대한 사실들

- 시간의 재정의

어린 시절 나는 좋아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다 그런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대충 아침 10-12시 사이 그리고 오후 4-5시 사이가 나한테는 그랬다. 어쩐 일인지 그 시간에는 집이 조용했고 어른들도 없었다. 왠지 기억 속에 그 시간은 날씨도 좋았던 것같다. 그리고 어려서 더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에는 유난히 정신이 맑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핸드폰을 덮어 두고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를 마셔야 겨우 만들 수 있는 그런 ‘집중’할 수 있는 정신보다 몇 배는 더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 시간대에 내가 뭔가를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냥 어린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좋은 시간들이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매일 주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냥 시간을 즐겼던 것 같다. 더 멋진 말로 하면 ‘향유’했던 것 같다. 시간이 그리고 그런 시간 속에 머물렀던 내 방이 나에게는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그런 시간은 없어져 갔다. 10-12시는 어제 미뤄뒀던 일을 급히 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4-5시는 지친 몸을 달래가며 마지막 업무를 하는 시간일 뿐이다. 그리고 퇴근까지 아직도 1-2시간이 남아 있는 시간일 뿐이다. 그나마 어린 시절 나에게 그 자체로 위안을 주었던 시간이 짧게라도 남아 있기는 하다. 6시 정도가 그렇다. 퇴근을 막 했고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은 직장인과 아빠 사이의 시간이 그렇다. 보통 나는 퇴근길 차에서 그 시간을 보낸다. 나는 그 두 시간대에서 상쾌하게 도망친 것이다. 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데 몸과 마음은 그저 편안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유 없이 옷장 속에 숨어들어가 그 속에서 느꼈던 어린 시절의 알 수 없는 해방감 같기도 하다. 더 이상 무슨 증명과 논리가 필요할까, 시간과 공간은 결코 균일하지 않다.


나에게는 기다려지는 시간이 있고, 아무 의미 없는 시간들이 있다. 그 둘은 같지 않다. 똑같은 1시간이라도 그렇다. 손목시계에 있는 1, 2, 3, 4 숫자들 사이의 동일한 간격은 거짓말이다. 틀렸다. 사람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다. 특별하지 않지만 왠지 좋은 시간이 있고, 좋지도 않지만 더 알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다. 이때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자같은 질문은 위험하다.


철학자들의 질문은 폭력적이다. What is a?라는 질문은 닦달하는 듯한 질문이다. 내가 알아내야겠으니 너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달라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는 위에서 말한 내가 좋아하는 시간들을 이해할 수 없다. 대신 몇 가지 솔직한 사실들을 펼쳐보자.


시간적인 것을 내가 느끼는 것 같다. 즉 나 인간에게는 시간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거의 본능적으로 앞뒤로 배열하고 정리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고, 그렇게 정리된 것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마치 그것들이 정말 시간 속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 것처럼 이제 확신을 갖게 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1시간 전에 책상에 앉았고 점심 먹고 2시에는 약속이 있다’는 생각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밤과 낮이라는 것도 시간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밤 12시와 낮 12시는 다르다. 이게 사실이다. 시계는 아무것도 모른다. 해시계는 시간을 재는 한 종류의 도구가 아니라, 진짜 시간을 알려주는 진짜 시계일 지도 모른다. 해를 아직 시계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해시계는 따뜻함과 눈 부신 햇살과 계절을 시간으로 알려준다. 옛날 사람들이 손목시계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작은 손목시계에 가둘 수 있다는 생각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은 공간인 것같다. 나는 몸이 편안함을 느끼는 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시간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10-12시 사이의 시간은 곧 내가 좋아하는 방이기도 했다. 


무엇이든 앞뒤로 배열하려는 나의 마음과 하늘에 떠 있는 해가 나를 앞뒤로 위아래로 둘러싸 공간을 마련하고 나는 시간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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