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ctor flotte May 17. 2024

쓴다는 것

- '목적'에 대하여

쓸 것도 없으면서 왜 자꾸 쓰려 하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알려지기 위해서라는 이유라면 그나마 괜찮다. 어쨌든 잡을 수 있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유 없이도 책을 쓴 적이 있고 그 두 권의 책은 앞으로도 세상에 알려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두 책이 아무도 모르게 완성이 된 채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명의 평범한 사람처럼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간 수많은 책들의 저자에게 바칠 뿐이다. 나는 왜 쓰고 있고 쓰려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써서 무얼 하려는 목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목표가 없이 쓰기 때문에 나는 이런 고민을 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목표가 없다는 것은 나를 쓰게 하는 고마운 일이다.


목표가 없다는 것은 적어도 딱 그만큼이라도 나는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게 이유인 것 같다. 내가 자꾸 무언가를 쓰는 이유. 내 시간이 왔고 나에게는 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이름을 달리해 목적이 된다. 목표가 자리를 비켜주면 목적이 흰옷을 입고 등장한다. 글을 쓰는 것은 목표가 없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눈부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나는 목표가 없는 곳에서 자유롭고 싶다. 목표가 없는 곳에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이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생각이 힘이 없었거나 아니면 나는 분명 딴생각을 했던 것이다. 주저하며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무책임했던 것이다.


목표가 없는데 무작정 책상에 앉고 싶었던 이유는 그냥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유를 느끼면 됐지 도대체 나는 왜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쓰고 있냐는 말이다. 동기야 알겠는데 그런 동기에 덧붙여 나는 왜 글자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나는 두 번째 깨달음에 이른다. 목적을 알게 된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찾고 즐거워하는 인간은 이제 그 고마운 마음에 책임을 지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순수하다.


목표가 없이 시작된 글은 흔들린다. 괜한 불안과 짜증에 커피만 들이킨다. 그렇게 쓸데없는 목표가 한참 천박한 춤을 추고 퇴장하면 목적이 고상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고는 목표와 차원이 다른 목적을 발견한 나는 행복해 한다. 다행히도 나는 이유 없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몰랐지만 더 자유롭고 싶었던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오랫동안 벌판을 걸어왔던 것이다. 벌판 한 복판에서 깨달았다. 내 왼쪽 호주머니 안에 그게 있었다는 사실을. 그럼 된거다. 앞으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나는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목표가 보이지 않지만 목적이 생겼으니 나는 이제 다시 일어선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선 것은 내가 찾은 목적에 대한 예의이다. 나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그것을 원한다. 책임이란 소중한 것에 대한 이러한 예의이다. 자판을 누르고 글자를 쓰는 것은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글자들이 어디로 걸어갈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는 동안 책임을 다하고 싶고 그래서 걷는다. 걸어가며 느끼는 걱정과 불안과 피곤은 내가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어떤 증언이다.


철학자들은 별을 보며 목적(Zweck)의 나라를 향해 걷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목적이 자유(Freiheit)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그 자유를 다시 호주머니에 소중히 도로 넣어 놓고 두 다리에 힘을 준다. 그것에 책임을 지고 싶은 내 순수한 마음에 순수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의무(Pflicht)라는 말을 불편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09화 시간에 대한 사실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