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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고독

- 어린 시절 창밖에서 들리는 겨울바람 소리를 기억한다

by doctor flotte

나는 어린 시절 창밖에서 들리는 겨울바람 소리를 기억한다. 마치 갑자기 코를 스친 어떤 냄새가 나를 언제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한창 밖에서 뛰어놀아야 할 어린이가 집에서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 추운 겨울이고 어차피 밖에는 노는 아이들도 없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조용하다 갑자기 강하게 부는 바람 소리였다. 집 창문이 변변치 못하니 그렇게 바람이 세게 불면 창틀이 움직여 둔탁한 소리를 낸다. 밤이면 무섭게 들렸을 것이다. 찬 바람은 가끔 으르렁거린다. 그래도 나는 집에 있으니 안전할 것이다. 바로 이 기억이 이유 없이 잊히지 않는다. 40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왜 거기에서 그렇게 있었던 것일까? 물론 집에는 사람이 없었고, 가지고 놀 장난감도 없다. 유일한 위안은 지금 저 추운 곳에 있지 않고 방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몸을 따뜻이 하고 추운 바람을 얼굴로 맞는 것처럼 나는 추위와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 안에서 이상한 쾌감을 느낀다. 저 춥고 세찬 바람소리가 이 방까지는 오지 못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무섭기도 했지만 안심도 되었다. 무서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것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순진무구한 아이가 창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는 모른다. 지금, 창밖으로 들리는 바람소리가 손쉽게 나를 그 이상한 어린 시절로 소환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한 분위기가 수십 년 후를 지나 지금 나에게 와 닿았다. 어린아이의 고독은 그 작은 몸을 통과해 어른이 된 이후로 흘러간다. 어린아이의 몸은 고독에 이용되고 어느새 지치고 졸리고 잠이 든다.


바람 소리, 특히 겨울바람 소리는 언제나 나에게 특별하다. 정확히 왜 그런지 알 수 없고 또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프랑크푸르트대학 도서관, 사람들이 별로 없는 예술 도서관 벽 쪽은 한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도서관에서 갑자기 작은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렸고, 나는 살짝 미친 사람처럼 그 바람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찾아 걸어 다녔다. 개가 냄새를 찾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알아냈다. 입구에서 가장 먼 쪽, 벽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니 안쪽에 무슨 틈새가 생긴 것인지 벽은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벽에 바짝 붙어 있는 책상으로 옮겼다. 넓고 텅 빈 공간 겨울바람 소리가 들리는 이상한 벽에 붙어 책을 읽으면 왠지 나는 마음이 깨끗해져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살짝 주변 눈치를 보며 나는 귀를 벽에 대 보기도 했다. 더 편안했다. 겨울, 방 안에서 바람 소리를 듣는 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린이도 고독을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아직 그런 말을 배운 적이 없으니 굳이 ‘나 고독하다’고 떠벌리지 않을 뿐이다. 말하지 못해 더 몸 안에 쌓여만 가던 고독이었으니 점점 몸 안에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 딱딱한 굳은살이 나를 40년 전으로 30년 전으로 또 30년 후로 40년 후로 마음대로 데리고 다닌다. 나는 그 기억이 나쁘지 않다.


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이었기에 이렇게 마음속에 굳은살이 되어 버린 것일까. 혼자 방에 있는 어린 나를 내가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해야 할까. 갑자기 커진 바람소리에 몸을 움츠리는 나를 ‘얘야 괜찮아’라고 다독거려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지금 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세상에 찌든 중년의 내가 그 아이를 그리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 소리 하나 때문에 손쉽게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사라졌을 것이다. 어린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기 위해 작은 몸으로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어린이의 고독’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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