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없는 것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시간이다
사실 지금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욕심과 희망이 마음대로 뒤섞여 끊임없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하게 한다. 새해에는 뭔가 더 잘 되어야 하고 좋아져야 한다. 작년보다는 말이다. 강박이다. 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인지, 이렇게 뭐라도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이 도대체 괜찮은 것인지 묻지 않는다. 자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음에는 다시 봄이 오는 것이라고 지구 전체를 보여주며 가르쳐 주지만 우리는 듣지 않는다. 우리에게 새해는 작년보다 1년이 더해진 새롭고 더 큰 숫자이다. 나는 세상 처음으로 새로운 해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해야 한다. 새롭고 더 좋은 것을 해야만 하고 나는 무어라도 더 획득해야만 한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높은 곳으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3월, 이미 그런 것들을 시작하고 한참 열심히 달리고 있어야 할 3월에 나는 아직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 시작은 커녕 솔직히 아직 방향도 잡지 못한 것 같다. 어디로 달려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3월은 항상 그렇다. 겨울도 봄도 아니고, 시작은 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3월.
날씨가 좋아 겨울은 다 간 줄 알았다. 그리고 3월이니 더 그랬다. 그런데 눈이 왔다. 뉴스에서 대설주의보라는 말까지 나왔다. 나는 운전을 했다. 뉴스에서 말한 대설주의보가 내린 곳으로 몇 시간을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정말 겨울이 있었다. 정말 한 겨울처럼 고속도로 옆에 눈이 쌓여 있었고, 차들은 점점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어제는 9도 10도까지 올랐는데 다시 한 겨울이 된 것이다. 이상하고 신기해서 운전하다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랑 한 겨울 눈들이 겨울처럼 들어왔고 추웠다. 하지만 전혀 나쁘지 않았다. 3월의 겨울이라 신기했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겨울이 한 번 더 나를 찾아온 것 같아 그저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 달리고 있는데 지나간 작년의 눈을 만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과거를 만난 것 같았다. 3월의 눈, 지난 겨울의 눈을 다시 만났다. 과거를 만나는 일은 꿈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진짜로 과거를 만나고 있었다. 시간은 내 뒤에서 와서 저기 잘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겨울의 눈은 이제 과거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 속 어딘가 있어야 할 눈이 지금 그리고 내 앞에 있었다. 녹은 눈들이 작은 물방울이 되어 왼쪽 뺨을 흘러내렸다. 그리고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3월은 사람들을 조급하게 한다. 마음은 급한데 연초에 세워두었던 일들은 아직 제대로 시작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빨리 좋아졌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르고 있고 일이 멈춰지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만 같다.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과거의 눈을 맞으며 갑자기 들었던 생각이 있다. 있지도 않은 ‘시간’이란 것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 수직선을 그려 놓고 왼쪽으로 쭉 뻗은 곳 어딘가에 과거라는 것을 놓고, 반대로 오른쪽으로 끝없이 쭉 뻗은 곳 어딘가에 미래라는 것을 대충 던져놓은 다음 나를 그 수직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란 끝없이 뒤로 끝없이 앞으로 뻗어나가기만 하고 나도 저 앞을 향해 내달려야 한다는 강박. 있지도 않은 그런 이상한 시간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단순한 착각이 나를 괴롭혔던 것은 아닐까?
3월에도 눈이 내리고 나는 겨울을 만날 수 있다. 지구가 그것을 나에게 증명했다. 지구에게는 날짜와 시간이 낯설을 것이다. 어제의 해를 3월 4일의 해라고 부르고 오늘의 해를 3월 5일의 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3월의 눈이 날짜와 달력에 치어 사는 내게 시간이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진짜 있는 것은 3월의 눈이고 사실 없는 것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