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발소에서 항상 문제가 한 가지 생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이와 이발소를 간다. 이발소에 가는 길은 행복하다. 내 어린 시절 기억도 그렇다. 수원시 고등동, 지금은 없어진 수도목욕탕 옆 이발소였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갔고, 어린 나는 앉은키가 작아 이발소 아저씨는 큰 이발소 의자 위 양쪽 팔걸이에 나무 빨래판을 올려놓았다. 그 위에 올라가 앉으면 나는 왕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귀밑 구레나룻에 따뜻한 흰색 거품을 묻혀 주고 어린 내가 보기에는 크고 위험해 보이는 이발소 면도칼로 왼쪽 오른쪽 구레나룻을 마지막으로 따주면 나는 다시 단정하고 멋진 아이가 되었다. 지금 우리 아이가 이발소 큰 의자에 앉아 안경을 벗고 퉁명스런 표정으로 큰 거울을 보고 있는 모습이 어린 시절 나 같아서 귀엽다. 작은 몸집에 목부터 큰 흰색 가운을 두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내가 아빠이고 아빠인 것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우리 아빠도 나를 그렇게 뒤에서 보고 계셨을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아빠들은 다 안다. 아빠와 아들에게 이발소라는 공간은 생각보다 특별하다. 미용실 말고 빨간색 파란색 이발소 표시등이 간판 아래 돌아가고, 흑백사진에 빛바랜 이용사 면허증이 큰 거울 위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동네 이발소 말이다. 그런데 행복하기만 한 이발소에서 항상 문제가 한 가지 생긴다.
이발을 다 하고 문 앞에서 계산을 하면 아이는 내 옆에 와서 붙어 있는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문 열고 나오면 나는 아이에게 한마디 한다. “솔아, 아저씨한테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해야지.” 아이는 인사했다고 한다. 그럼 나는 “지난번에 아빠가 조금 더 크게 말하라고 했잖아, 다음에는 더 크게 해야 돼.” 아이는 아마 다음번에도 들릴랑 말랑한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잠깐 동안 걸으면서 조용해 진다. 신호등 앞에서 다시 아이 손을 꼭 잡고 건너면 아이는 다시 웃는다.
직업병인지, 나는 갑자기 ‘올바르다’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나는 아이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나에게 ‘그게 왜 올바른 거야?’라고 물어보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아니 조금더 심각하게 ‘아빠, 올바르다는 게 도대체 뭐야?’라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어른들과 함께 있다가 헤어질 때는 그렇게 인사를 해야 하는 거야’라는 대답 뿐일 것이다. 하지만 왜 항상 그래야 하는 것일까, 올바르다는 것은 왜 좋은 것이고, 또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 누군가 누구를 혼내게 되는 것일까? 올바르다는 것, 옳다는 것,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 철학자 아빠라면 아이에게 그걸 먼저 설명해 주어야 했던 게 아닐까.
아마도 아이는 다음 달이 되어 또 나랑 이발소를 가고, 내가 먼저 기억해 ‘이번에는 꼭 아저씨한테 안녕히 계세요라고 크게 얘기해야 돼’라고 미리 말하면 아이는 그렇게 할 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내가 엄격하게 말하면 아이는 말을 더 잘 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왜 좋은 것인지 나는 아이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고, 아이도 그게 왜 그래야 하는 건지 모른 채 단지 아빠한테 혼날까봐 인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 소크라테스처럼 아이와 함께 걸으며 ‘올바르다’는 것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스크림을 먹느라고 정신이 없는 4학년 꼬마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아빠는 자신도 모르면서 아이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다그친다. 착한 아이는 아빠가 기분이 좋지 않을까봐 아빠가 시키는 대로 인사를 한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른 채 말이다. 초코아이스크림 때문에 입술 위에 수염이 그려진 우리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야 아빠가 좋아하니까’ 단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이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