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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

- 실은 비겁한 내 마음이

by doctor flotte

은밀한 생각을 혼자서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닌 척 밖으로는 젊잖은 사람으로 대우받으며 살아간다. 속으로 상대방을 욕할 수 있다. 물론 표정으로 완벽하게 가릴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리고 다행인 것은 아직 누구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 안에서 마음껏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미친 사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생각을 아주 쉽게 용서받는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아닌 척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은 정말 안전한 것 같다. 내 몸을 보면 확실하고 안전하다. 내 몸은 나와 세상을 완벽하게 구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이 불투명하고 두터운 이 살들을 뚫고 들어올 일은 없다. 세상 속에 있지만 완벽한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사람들과 얘기를 할 때에도 나만의 공간은 안전하다. 대화를 하지만 나는 얼마든지 나를 감출 수 있다. 겉으로는 대화를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내면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말을 쳐내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인사말과 맞장구, 적대감을 살 필요는 없으니 약간 웃어주는 노력이면 그만이다. 말수를 적게 하고 가끔 지긋이 상대방을 바라봐 주기만 하면 나는 거의 완벽하게 나의 내면을 보호할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나는 완벽한 내면의 승자이다. 아무도 내 내면을 건드릴 수 없다!


세상을 피해 있는 나의 내면이 주는 이 아늑함과 편안함은 쉽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만들어낸다. 그 둘을 구분하는 몸을 보면 내면은 세상과 다른 쪽에 있는 작은 공간인 것 같다. 부피를 가진 몸 안에 있다면 어쨌든 그것도 어떤 공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마치 내가 사는 집의 벽이나 현관문, 창문 같다. 그 안과 그 밖을 구분해 주는 것 같다. 기껏해야 나는 내 방이나 내 집처럼 나의 내면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기준이란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 내 방의 벽과 문과 창문처럼 말이다. 나의 마음이 내면, 즉 안에 있는 것이라면 밖에 있는 세상과 어디에선가 구분이 되고 있어야 할 텐데, 내면과 외면이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 실은 내 몸이나 피부일 리도 없다. 사고로 팔다리를 잃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상한 병으로 내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나를 감출 수 있다. 뇌가 곧 나의 마음이 아니라면 그 안에 어디엔가 나의 마음과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그럼 뇌 안에 어디에 나의 마음과 생각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시계 안에 시간이 있을 수는 없다. 수많은 작은 톱니바퀴가 아무리 정교하게 맞아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시계 안에는 아침이라는 시간이, 쉴 수 있는 점심이, 어두운 저녁이 있을 수 없다.


나의 마음은 내 몸 안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주 쉽게 어렵지 않게 속으로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리고 밖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의 안과 밖 말이다.


안과 밖이라는 구분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런 구분을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첫 번째는 아닌 것 같다. 어디에도 그런 경계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두 번째를 생각해야 한다. 실은 비겁한 내 마음이 그런 구분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들키지 않고 숨고 싶은 마음, 그저 귀찮아서 피하고 싶은 마음, 피했다고 안심하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들이 말 그대로 실체 없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내 마음을 내 방처럼 함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이 어리석음은 언제쯤 끝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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