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문지 종이학

- 아내가 신문지로 된 종이가방을 들고 왔다.

by doctor flotte

아내가 신문지로 된 종이가방을 들고 왔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장애인 단체에서 신문으로 만든 종이가방을 샀다고 했다. 모양은 딱 종이가방인데 자세히 보면 손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특히 손잡이 부분이 어설펐다. 신문지를 얇게 말아 끈처럼 만들고, 펀치로 낸 구멍에 끼웠다. 그리고는 빠지지 않게 그 끝을 접어 올려 원래 끝에 대고 마지막으로 테이프 대신 신문지에 풀을 발라 돌려 감았다. 당장은 쓸 수 있겠지만, 손잡이가 신문이고, 접힌 부분이 벌써 해지기 시작했다. 젖은 손으로 잡았다가는 금방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전체적으로 종이가방 모양이 선명해 나는 원래 있던 종이가방에 신문지로 덮어 만든 건가 했다. 만져보니 두꺼운 종이로 만든 것처럼 두껍고 빳빳했다. 종이가방은 접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접히는 부분도 원래 있던 종이가방처럼 잘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주방쪽 바닥에 놓여있는 이 신문지 종이가방을 며칠 지나치며 보곤 했다.


며칠 자꾸 눈에 거슬렸다. 잘 만들어진 신문지 종이가방이 왠지 나를 자꾸 신경 쓰게 했다. 이 종이가방이 왜 나를 신경쓰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다시 그 종이가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이 종이가방은 전체가 신문지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두꺼운 원래 종이가방에 그저 신문지를 덧붙여 판 게 아닐까 했는데, 이 종이가방은 신문지 몇 장을 풀로 여러 겹 덧붙여 두껍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봤는데 바닥 쪽 마감이 참 잘 되어 있었다. 그냥 대충 만든 것이 아니라, 정확히 길이를 재가며 오랫동안 만들어 온 분의 솜씨가 느껴졌다. 완전히 신문지와 풀만으로 만든 솜씨 좋은 작품 같았다.


이 신문지 종이가방은 완전히 손으로 만든 작품 같았다. 어느 작가의 이름과 함께 미술관 가운데 전시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관람료를 내고 들어와 한껏 예의를 갖추어 이 작품의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느라 애쓸 것이다. 그런데 이 종이가방을 만든 분도 스스로 작품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떤 장애를 가진 분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분은 하루 수 십개의 신문지 가방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신문지 종이가방은 작품일까 아닐까. 또 아마도 나처럼 약삭빠른 사람들이라면 ‘친환경’이라는 스티커를 붙여 팔았을 것이다. 요즘 여기저기 친환경이 대세이니, ‘폐신문지를 활용한 지속가능한 종이가방!’이라고 홍보하면 좋을 것이다. 그럼 이 종이가방은 친환경 재생용품이 되는 것일까? 실은 재정이나 지원이 변변치 않은 지역 장애인 자활센터에서 수익사업을 위해 재료 값이 안 드는 신문지를 주변에서 기증받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경우에도 친환경이 되는 것일까? 수익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고 돈이 없어 신문지로 만들었을 뿐이라면.


예술가가 작품이라고 우기면 작품이 될 것이고, 친환경 단체에서 지속가능한 재생용품이라고 홍보하면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신문지 종이가방이 며칠 나를 신경쓰게 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저건 작품일까, 친환경 제품일까? 실은 그것과 아무 상관 없이 만들어진 물건이고, 심지어 센터가 제대로 된 재료를 구할 돈이 없어 선택된 궁여지책이고 작품이나 환경을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어떤 장애인이 그저 일을 하듯 수고롭게 만든 수십 수백개의 물건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그럼 또 반대로 저건 작품도 아니고 환경과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일까?


나름대로 예쁜 모양을 생각하고 선을 맞추어 모두 손으로 직접 만든 똑같은 것은 없는 세상 속 단 하나의 작품이다. 버려지는 신문을 가져와 만든 것이니 폐기물 처리 비용을 아끼고, 나중에 이대로 버린다 해도 환경에 피해를 줄 것 같지는 않다. 어린 아이가 색종이로 만든 종이학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저 신문지 종이가방에는 자립을 걱정해야 하는 장애인의 마음도 담겨 있을 것이다. 순수함과 성실함,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희망이 자꾸 저 신문지 가방에서 보이고 들리고 한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14화잃어버린 레고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