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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바다가 저기에

- 게으름이 죄가 되지 않는 이 시간

by doctor flotte Jan 06. 2025

오랜만에 동해바다로 갔다. 처음 동해 경포대에 갔을 때 느꼈던 감동이 아직 남아 이렇게 종종 나를 다시 부른다. 대관령에서부터 조금씩 오른쪽 창가 넘어 저기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동해바다. 아직은 멀어서 하늘인지 바다인지 헷갈리기도 하는데 조금씩 선명해지고 어느 순간이 되면 차 정면으로 저기 바다가 보인다. 동해 여행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나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선 것이다.


조용해서 즐겨 찾는 호텔이 있다. 경포대를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유명한 호텔인데,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방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복도 쪽 소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만 빼면 완벽할 정도로 조용하다. 운이 좋아 높은 층으로 배정을 받았다. 조용한 호텔 방, 큰 정면 유리로는 더 큰 바다가 보인다. 완벽히 조용한 공간 속에서 아무 소리 없이 진한 파란색 바다를 눈으로 바라본다. 움직이는 바다그림을 혼자만 있는 전시장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발코니 창을 열고 나가 본다. 겨울 바다는 창을 열고 나와도 조용하다. 그래서 더 좋다. 호텔 발코니에서도 충분히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렇게 조끔씩 나는 바다로 간다.


위아래 잔뜩 옷을 껴입고 바다로 나가본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그럴 텐데, 많이 추운 날 따뜻하게 옷을 입고 냉기를 온통 얼굴과 코로 받아들일 때 느껴지는 아늑함이 있다. 춥지만 아늑하고 정신은 맑아지는 그 기분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 아무튼 그렇게는 추운 벤치에도 얼마 동안 앉아 있을 수 있다. 겨울 바다를 걸으면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닷가를 걷는 것, 다른 하나는 기념으로 가져갈 예쁜 조개껍질 하나를 줍는 것이다. 별것 아닌 조개껍질 줍기에 집중하다 보면 여기저기 모래사장을 옮겨 다니게 된다. 콧물이 나온다.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하면 얼른 추위를 피해야 한다. 추위가 몸 안으로 파고들면 남은 여행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가 등 뒤로 지기 시작한다. 바다는 동해 특유의 옅은 분홍색 노을을 잠깐 보여주다가 금세 어두워진다.


호텔 TV는 어디 구석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렇게 클 필요도 없다. 퇴근길 차 안에 있을 시간, 집에 오는 홈플러스에서 저녁거리를 사다가 어차피 지나가 버리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시간, 저녁 6시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한 호텔에서 다시 바다를 보고 있다. 없는 시간을 선물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저녁으로 무얼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간식에 빵에 뭔가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혹시나 밤에 차를 타고 나가고 싶지 않을까해서 무알콜 맥주를 마셨다.


호텔에는 욕조가 있어야 한다. 비용을 더 지불하더라도 욕조가 있는 방을 구해야 한다. 그래봐야 일 년에 몇 번이다. 호텔 따뜻한 욕조에 맘껏 몸을 담그는 것은 결코 과소비가 아니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더 그렇다. 욕조에 누워 귀 바로 아래까지 숨만 쉴 수 있게 최대한 몸을 담가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몸이 물속에서 붕 뜬다. 재미있어서 자꾸 해 본다. 뜨거운 물을 두세 번 채워보다가 물이 또 식으면 이젠 밖으로 나온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 행복하다. 게으름이 죄가 되지 않는 이 시간. 몸의 작은 움직임과 내 생각의 속도가 정확히 일치한다. 생각에 부담을 주지 않아 내 몸과 이 공간의 모든 것이 충분해지는 이 시간. 호텔 벽에 시계가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시간이 없는 공간 속에서 느리게 움직여 본다. 내일도 바다가 저기에 있으니 자면서 꿈을 꿀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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