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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by doctor flotte

글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끔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한 번 써 보고, 그러다가 다시 몇 번 고쳐보기도 하고, 이제 됐다 싶으면 던져 버리고 신경도 쓰지 않는 글들, 그렇게 쌓여가는 저 글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누군가 읽고 공감해 주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문제는 딱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글은 딱 거기까지 가다가 멈춰버린다. 고상한 취미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그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되는데, 나는 왜 하는 것일까? 왜 쓰는 것일까, 안 해도 되는 것을 말이다.


글을 쓰고나면 마치 미뤄둔 숙제를 다 한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나는 숙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아니 지금까지 썼던 글들을 다 버려도 사실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쓰게 되고, 써야 마음이 편하다. 특히 이런 글, 이런저런 고민과 걱정, 절망들을 이제는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정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그냥 제 할 일을 하듯 감수하며 써 내려가는 글들이 나를 며칠은 편안하게 한다. 물론 나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백 명이 그런 생각을 하든, 천 명이 그런 생각을 하든 지금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그 백 명이나 천 명이 모두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솔직히 글을 쓴다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일까?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느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만들어가는 힘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냥 시간 날 때 가끔 하는 취미가 아니고.


글을 쓸 때 내가 빠져 있는 그 진지하고 성실한 삶의 감정들을 나는 일상 속으로 얼마나 가져 오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나는 글을 쓸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또 다른 해방감을 느낀다. 글을 쓰는 나와 전혀 그렇지 않은 나는 하루를 살아가는 두 명의 인간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두 명의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자꾸 물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되는 것인지, 글이라는 것이.


잠깐 반대로 생각해 보자. 글이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 시키고, 특히 그런 영향과 변화를 내가 느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럼 나는 더 좋은 삶을 위해 글에 집중하고 더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사용할 것이다. 이따금 게을러져서 글쓰기에 소홀하게 되면 나는 죄책감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 죄책감에 또 글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삶이 글에 파뭍혀 버리고 말 것이다. 글도 결국 삶인데 말이다. 그것은 거짓이다.


하나의 사실, 글을 써도 내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글이 나의 삶을 쉽게 바꾸는 것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처음으로 온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이 조금 다듬어졌다. ‘글은 나의 삶을 바꿀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다.’ 그럼 한 가지 가능성이 다행히도 남아있는 것이다.


글이 나의 삶을 바꾸기를 바라는 마음, 글 속의 나의 모습이 내 삶 속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쓰는 것이다. 바라는 마음, 바란다는 것.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과는 다른 ‘바라는 마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약속은 못하겠지만 미련이 남아있는 마음.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내 몸 안에 있는 ‘기다리고 싶다’는 내 마음.


일단은 그렇게 정리하자. 그래야 당분간은 또 미련이라도 남아서 글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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