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 생각의 낙수]
I.
오스트리아의 빈은 미술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여행지이다. 유럽 한 달 여행 중 빈에서 5박 6일을 머물렀다. 이 기간 중 여러 음악회와 미술관을 찾으면서 이 도시의 매력을 만끽했다. 미술관은 빈 미술사 박물관을 비롯해 알베르티나, 제체시온 미술관, 클림트의 키스로 유명한 벨베데레 등 여러 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에곤 실레의 컬렉션으로 꽤 명성이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은 찾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에곤 실레의 그림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에곤 실레는 이른 나이부터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았던 뛰어난 화가였다고 한다. 클림트는 일찌감치 에곤 실레의 우수함을 알아보았다고 하며,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뒤를 이어 빈 분리파, 즉 제체시온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첫아기를 잉태한 사랑하는 아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고, 그 사흘 후 자신도 28세의 젊은 나이에 같은 병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남긴 작품들은 깊은 감상을 자아내는 명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평론가들의 이야기이고, 나는 그의 그림이 불편했다. 그가 표현한 인물들은 괴기스러웠으며 피부는 썩어가는 시체를 묘사한 것처럼 느껴졌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접한 에곤 실레의 그림들에서 느낀 감정은 그의 그림들이 주로 걸려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을 피하게 만들었다.
레오폴드 이외의, 빈에 있는 다른 미술관에서도 에곤 실레의 몇몇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역시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II.
최근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렸던 뭉크의 작품전 <Beyond the Scream>에 다녀왔다. 갈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전시회가 끝나기 1주일 전에 미술관을 찾았다. 뭉크라는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였지만, 흔쾌히 발걸음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그의 대표작 <Scream>, 즉 <절규>가 주는 불편한 느낌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절규> 이외에 뭉크의 다른 작품은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전의 제목이 <Beyond the Scream>, 즉 <절규> 이외의 다른 좋은 작품도 많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가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했다. 또한 유튜브 ‘언더스텐딩’ 채널에서 ‘Arts in You’의 이세라 대표가 뭉크와 이번 전시회에 대해 설명한 프로그램을 보고 관람을 결정했다. 과거 기상 캐스터로도 활약했던 이세라 대표는 이번 전시회에서 오디오 가이드의 음성도 담당했다.
다녀온 느낌은 아주 좋았다. 판화에 뭉크 본인이 채색을 한 <절규>도 있었지만, 그 외에 그의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절규>에서 그림의 앞부분을 채우고 있는 인물은 뭉크 본인이다. 난 뭉크가 절규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알았으나, 뭉크는 자신이 자연의 절규를 듣고 너무 놀라 귀를 막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 버전의 <절규> 중 대표적인 그림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글씨로 한 문장이 쓰여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 그림은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오랜 감정을 통해 그 글씨는 뭉크 본인의 것이라고 결정지었다. 실제로 뭉크는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갔다고 한다.
뭉크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편하지만은 않은 그림들이 많았으나, 우리네 인생도 불편한 여러 가지들을 마주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의 그림들은 기괴하기보다는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느낌으로, 불편함을 외면하지 말고 마주하라고 외치는 듯도 했다.
글쎄, 빈의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들을 마주했다면,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빈에 다시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레오폴드 미술관을 한번 찾아가야겠다.
III.
현역시절, 언론 홍보를 담당할 때의 일이다. 회장의 비서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장님, 큰일 났어요. OOOO의 기자가 전화를 해서 무조건 회장을 바꾸랍니다. 안 계시다고 했더니, 엄청 부정적인 기사에 대해 확인을 해야 되는데, 오늘 중에 연락이 안 되면 기사는 그대로 나간대요…”
바로 해당 기자와 통화를 했는데, 기자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일단 해당 언론사로 찾아가서 설득을 하든지, 빌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그 언론사까지는 버스 정류장으로 두세 정거장쯤의 거리였다. 마음이 괴롭기도 했고, 생각도 정리할 겸 걸어서 이동했다. 아직 춥지는 않은 늦가을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그들 모두는 즐겁고 활기찬 표정으로 느껴졌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행복한데, 왜 나만 이렇게 처절하게 힘든가’하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닥친 내 일이었다. 해당 기자와 만나 해명하고 설득하는 길고 괴로운 시간을 보낸 후, 그 기사는 취소하기로 했다. 그 기자에게는 다른 기삿거리 제공을 약속했고, 그 이후 그와는 꽤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불편한 현실과 마주했나 보다.
IV.
한 친구가 원양어선의 선원으로 지원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놀라 펄쩍 뛰면서 말렸다. “네가 아무리 체격과 체력이 좋다고 해도, 그건 무리다. 가족들도 생각해라.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다.” 경험 없는 사람이 원양어선을 타면 잘못하다가 손가락이나 손을 다치는 경우도 생기고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도 있었지만, 차마 그 얘기는 친구에게 하지 못했다.
친구는 지난해에는 공원의 조경과 청소 등을 담당하는 공공근로를 몇 달 했다. 그 후 젊은 사람들도 따기 힘들다는 자격증을 따서 정보보안 모니터링을 하는 일을 했는데, 이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던 모양이다. 내내 모니터만 바라보아야 하는 데다가, 일로 만나는 다른 회사의 젊은 직원들이 무례할 경우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양어선 얘기까지 꺼냈던 모양이다. 다행히 그는 원양어선을 타지 않았다.
그리고 올여름에는 일이 없어 쉬는 동안에, 묘한 인연으로 공사장의 신호수 일을 두어 달 했다고 한다. 공사 구간에 지나는 차들의 교통 안내 및 통제를 하는 일이다. 나는 공사 구간에서 신호수를 보면 ‘참 편한 보직이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여름에 뙤약볕 아래 서있는 것부터가 고역일 텐데, 지나가는 차들이 잔 돌을 튕기면서 지나가면 최소한 아프거나 심하면 다칠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는 그래도 마음 괴로운 것보다 몸 쓰는 일이 낫고, 공원 조경보다는 신호수 일이 수월하다고 했다. 힘든 일도 상대적인 것이며, 자신의 마음과 느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이달 들어 친구는 투덜대면서 다시 모니터 바라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V.
다른 친구와 늦은 시간, 동네의 허름한 카페에 들어갔다. 말이 좋아 카폐지, 커피부터 맥주, 소주를 비롯해 떡볶이, 어묵탕 등 서민적인 먹거리까지 두루 취급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2,30대의 손님은 볼 수 없고 5,60대의 손님들이 주축인데 70대 이상으로 보이는 손님들도 남, 녀 불문 북적였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은 중년의 여사장 혼자였는데, 그녀는 주문받고 음식 만들랴, 계산하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일을 더욱 극한직업으로 보이게 했던 것은 6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초로의 여성 손님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왜 국물 떡볶이가 이렇게 짜냐’, ‘내 옆에 있는 분은 지난번에도 같이 왔던 언닌데, 왜 살갑게 아는 척 안 하냐’ 등 거의 생으로 시비들을 거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장은 희한하게 미소를 잃지 않고 그녀를 대했다. 심지어 한 고령의 손님이 심하게 체한 것 같다며 긴 의자에 드러눕자, 반짇고리를 가져와 손가락을 따 검은 피를 빼주기까지 했다.
그 카페가 옛날 정서를 가지고 있는 정말 사랑방 같은 곳인지, 아니면 그 사장이 인성이 그런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극한직업 같아 보이는 일도 그분은 편한 일상으로 대하는 느낌이었다.
카페에서 나오자 늦더위의 열대야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으나 내게는 밤공기가 시원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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