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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철여 09화

장밋빛 거짓말

단번에 문을 닫다

by 나철여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아주 열심으로 살았다.


분명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여전히 그 자리다.

생각을 따라가다 뚝 끊어진 자리에 민들레 꽃씨가 있어, 뚝 끊어, 후우 불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꽃씨는 어디에 박힐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듬해 노란 꽃으로 길가든 돌틈이든 어디든 피어있다.


바람 잘 날 없는 옷장사,

변심으로 인한 상품교환은 그나마 다행이다.

알고 속고 모르고 속는 고객의 환불 스토리에는 알다가도 모를 뻔뻔한 미스터리도 있었다.


미스터리 한 고객


쭉쭉빵빵 잘 빠진 몸매는 보는 사람도 신난다.

매장 전면 주차장은 통유리를 통해 고객 맞이엔 늘 한 발 앞선다. 자동문이 열리고 고급 외제차의 스마트 키 잠금소리까지 스마트했다.

부러질 듯 잘록한 그녀의 허리는 짧달막하고 배 튀어나온 사내의 팔에 껴 있다. 한눈에 봐도 부부는 아니다.

팔자걸음으로 들어오는 사내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굵고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사내는 익숙한 듯 다리를 꼬아 쇼퍼에 기대앉았다. 테이블에 툭 던져진 손가방은 그 옛날 일수가방이랑 흡사하다.

철여는 그런 가방만 보면 왜 주눅이 드는지 모른다.


여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옷을 고르며,

"이건 어때?"

사내는 옷을 인정하기보다 그녀의 애교와 요망스러움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좋네' '그런 색도 좋아 좋아' 하며 연신 핑크빛 눈짓을 보낸다.


"당신 것도 골라봐"

"난 뭐" 하더니 모델워킹을 하며 여성복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부터 행거에 걸린 옷까지 한아름 집어 계산대로 가져왔다.


"이제 가게 문 닫으시오!"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내의 한마디에 그녀는 사내에게 화들짝 안겼다.

소설도 아니고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600만 원어치, 그것도 현금으로 지불했다. 일 매출이다.


다음날 하얀 외제차에서 내린 그녀는 쇼핑백 세 개를 그대로 들고 와 여성복만 반품했고 환불해 갔다. 끔 카드깡? 하는 고객은 봤어도 현금 돌려치기는 처음이다.

잠시 좋다 말았다.


웬걸 싶으면, 웬일이 꼭 벌어진다.


또 왔다. 또 환불?

이번엔 그녀가 10분 먼저 들어오고, 10분 후 미리 약속한 듯 다른 사내가 들어왔다.

그 10분 사이에 우린 한패가 되었다.

두 번째 방문은 그녀의 기술을 보게 되었다.

환불 조건인 구매였다. 대신, 구매해 가는 상품은 그 마진만큼 뺀 환불 조건이었다. (...)

유혹은 강렬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훅 들어 온 펀치같은 유혹이다.

그마저도 거절하면 소비자 고객 상담실에 신고 할 거라는 협박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했다.


잠시 우린 공범 아닌 외도하는 사내들에 대한 응징에 가까웠다.


돈 돈 돈 돈에 돈 여자들,

그리고

미스터리 한 그 여성고객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쁜 것들은 점 하나씩 있다.

그녀도 오뚝한 코에 점 하나가 있었기에 기억은 쉬웠다. 지금까지 오래도록 그녀의 진한 불가리 향수도 기억에 남아있다.

판매직원의 표정은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일 거울 보며 연습한다. 환불고객의 응대는 입모양은 같지만 치이즈가 아니라 치이지랄이다.
그럼 좀 더 웃는 얼굴이지만 속으로 시원한 지랄을 해댄다.

그렇게라도 풀어야 판매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지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순간을 본다.



“자기 빨리빨리~”하며

쫒기 듯 매장으로 뛰어 들어오는 두 남녀가 철여에게 손사래와 함께 눈 찡긋하며 급히 구호 신호를 보낸다.

척 보면 척이다. 상황은 불륜커플이 들키기 직전이다.


더 바빠진 철여는 불륜커플에게 자비를 베풀 듯,

“언니는 피팅룸 여기로! 싸장님은 저쪽 창고로 들어가세요...”


뒤이어 너무나 반듯해 보이는 오십 중반 여인이 매장으로 끌리듯 들어온다.

여인은 차분하게 행거에 걸린 바람막이 얇은 코트 하나를 잡더니


"저... 이건 프리사이즈 인가? 입어볼게요" 한다.


철여는 재빨리

“아~네! 이쪽 피팅룸으로 모실게요. 고객님” 하며 다른 쪽 피팅룸으로 안내했다.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불륜녀는 태연하게 이것저것 마구 집어 들고 다시 피팅룸으로 들어가며 여성을 힐끗 훔쳐본다.

불륜녀는 남자의 부인 인 걸 알지만, 중년여인은 전혀 모르는 분위기다.

철여에게는 가끔 연중행사처럼 찾아오는 보너스 기회이다.


‘고객은 왕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야, 내가 왕이야’

‘사모님의 원수는 내가 갚아줄게요.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며

겉과 다른 속을 철여는 요리조리 천연덕스레 잘 다룬다.


이어 중년부인은 피팅 룸에서 차콜그레이색 바람막이 코트를 걸치고 나오며

“갑작스레 웬 바람이 이리 부는지 그냥 바로 입고 갈게요. 변덕스러운 봄 날씨, 모임에 이렇게 입고 가겠어요.”

"아 네. 다행히 맘에 드셨네요. 어쩜 이렇게 하고 오신 귀걸이랑 코트랑 진짜 잘 어울려요"


그때 뒷걸음질 치며 피팅룸에서 나오는 불륜녀가

"언니 걸렸어요. 뒷 지퍼가 내려오다 씹혔나 봐" 콧소리에 당당한 여유다.

그녀는 거울로 비친 중년부인을 순식간 훑는데 자기가 골라준 그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눈치였다.

지금 두 사람이 같은 디올 귀걸이를 하고 있다는 것도 불륜녀와 철여의 눈에 만 보인다.

불륜녀가 지퍼에 ‘걸렸다’는 말에 하마터면 철여의 웃음이 터질 뻔했다.


“네네 고객님 내려드릴게요” 하며 내려주는 지퍼사이로 불륜녀의 골 파진 등과 까무잡잡한 피부마저 같은 여자가 봐도 홀리고 섹시해 보였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사모님,

“저 계산해 주세요. 모임 시간 늦겠다..” 하며 카드를 내미는 부인에게

“감사합니다. 고객님의 소중한 구매 꼭 기억할게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예요. 핸드백에 넣어 다니시다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 살짝 두르기 좋은 사각 스카프예요. 또 시간 나실 때 들러주시면 멤버스 등록도 해 드릴게요.”


"감동이네, 많이 파세요." 하는데

'당신 남편 지금 바람나서 저기 숨어있어요'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선 넘지 말아야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모르는 게 약이야.'

이내 철여는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거 정리를 했다.


어색한 철여,

“아유~ 밖엔 바람이 많이 부네. 점심 먹으러 간 직원이 아직 안 오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직원 별이가

“저 왔어요. 이제, 식사하고 오세요.” 하는 그때 바로

피팅룸에서, 창고에서, 동시에 불륜커플이 나온다.


불륜커플은 너무나 태연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히려 놀란 건 직원 '별이'였다.


불륜녀는 능숙하게 어깨를 들척이며 계속 옷을 고른다.

그리고는 그 남자에게

"이것 다 사 줘~!" 하는데, 싼 티 나지도 않고 되레 귀엽기까지 했다.

불륜남은 들키지 않은 게 좋은지 벌어진 입을 간수 못하고

"다 싸주세요 여기 현금이요"


둘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낀다.

속닥대며 쇼핑백을 들고나가더니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갔다.


직원 별이는 전산을 들여다보

"와우, 그새 탕! 탕~! 탕치셨네 하이파이브~!"

"어떻게 된 거예요?"

“몹쓸 바람 덕분이란다. 이럴 때 바람은 싫어만 할 수 없더라고. 바람은 공기 이동이라 미세먼지도 날려주는 정화역할도 한다지?” (아무 말 대잔치)


IMF가 거쳐가고 코로나가 세상을 바꿔도 불륜은 다양하고 여전하다.


그 둘은 꼬리 감춘 여우,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았다.

바람 바람 바람

완전한 바람은 없다.

신분은 입었는데 수준을 벗지 못하는 남자는 여자를 소모품처럼 다룬다.

남자를 핸드백쯤으로 여기는 여자도 있다.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매출 꽝의 불안은 어느 날 하루도 찾아오지 않은 날이 없다.

마감 전 마지막 고객에게 과도한 예의도 비굴함이지만, 90도 인사가 절로 나온다.

판매와 매출에 신경 쓰다 보면 사소한 일에도 민감해지고, 표정관리는 기본이다. 거울이 닳도록 들여다보고 마네킹이 흐물거릴 정도로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힌다.

고객에게 표현 못 한 말, 직원에게 받은 상처까지 넋두리하기엔 마네킹 만한 게 없었다.

어떤 날은 마네킹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한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대박 매출이다.


어느 해 가을,

옷만 팔던 철여가 마네킹의 옷을 낙엽으로 직접 디자인해 입혔다. 진짜 잠자리 한 마리가 마네킹 어깨에 살포시 앉아 있어 사진을 찍어두었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볼 때마다 홀로 기분 좋은 날이다.)

매장 밖에서 찍은 사진...by.철여
매장 바로 옆에는 어린이회관과 숲공원이 있다.
가끔 데이트족이 들어와 건전한 쇼핑도 하지만 불륜커플들이 화끈한 쇼핑을 해 주기도 한다.

그냥저냥 몸도 마음도 지친 날, 철여는 공원 산책을 한다.
산책하면서 곱게 물든 낙엽을 하나씩 주워 담다 보면 어느새 에코백을 가득 채운다.
그 낙엽으로 마네킹 옷을 지어 입힌 거다.
(오른쪽 어깨 위에 앉은 잠자리가 놀랄까 봐 윈도우 밖에서 찍었는데 잘 보이지 않네...)



장밋빛 거짓말은 결혼 청혼부터 시작되었다.

장밋빛 거짓말은 점점 더 진짜 같았다.

철여는 남편이 평생 백마 탄 왕자처럼 멋있을 줄만 알았다.

백마 탄 환자 신세가 되었다.


'진짜 예뻐요' '너무 멋있어요'

장사꾼의 1초 칭찬도 알고 속고, 결혼 청혼 장밋빛 속삭임도 모르고 속는다.

옷장사도 평생 할 줄 알았다.

(남의 약점을 이용 한 한탕 매출도 이제 그만)

장사 참 어렵다, 먹고사는 게 다 그렇다지만.


이제 먹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싶은 어느 날,

남편에게 갑자기 찾아온 사느냐 죽느냐는 건강 문제를 당장 풀어야 했다.

철여는 주저 없이 보호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단번에 모든 문을 닫았다. 반품도 환불도 변심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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