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사랑을 배운다
신은 모든 인간과 함께 하고 싶어서 '엄마'를 보냈다.
엄마가 되고 보니 신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지,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엄마는 언니를 낳고 의상실을 시작하셨다. 동대문에 가서 천을 떼 오고, 미싱 일을 배우려고 도매상 가게에 찾아가서는 하루 종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기만 했다 하신다.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사람을 무안하게 세워두기만 했다는 그 사장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이 상했다.
“만나기만 해 봐라” 하며 씩씩거리게 되고,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쩔쩔매던 젊은 엄마의 모습이 가엾었다.
엄마와 아빠의 허벅다리에는 지금도 커다란 화상 자국이 남아 있다.
의상실에서 일을 하던 어느 겨울, 난로 위 주전자가 터지면서 끓는 물이 쏟아져 둘 다 크게 화상을 입으셨다. 엄마는 아빠가 더 심하게 다치셨다며, 함께 화상 치료를 받느라 며칠 동안 일을 못하고 누워 계셨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엄마 아빠가 겪으신 홍수 이야기, 화상 사고 이야기, 그리고 엄마의 처절했던 의상실 초기 시절 이야기. 그 어떤 영화보다도 생생하고 흥미로웠던 우리 삼 남매의 태몽 이야기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겨울밤, 우리는 고구마를 까먹고 귤을 까먹으며 웃고 울곤 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엄마는 조미김을 만드시곤 했다.
신문지를 크게 몇 장 깔고, 그 위에 작은 버너를 놓고 재래시장에서 사 온 김 묶음을 풀어 김을 한 장, 한 장 불에 궈서 옆에 두고 다 구워진 김에 참기름을 솔에 묻혀 슥슥, 삭삭 그리고 가는소금을 촥촥.
반복되는 리듬을 타고
굽고 바르고 뿌리고 작업이 끝나면 가위로 싹싹 잘라 통에 가득 담아 두어 맛있게 먹었다.
어떤 날은 그냥 구운 김에 각자 먹고 싶은 김밥도 만들어 먹었는데,
구운 김 한 장을 깔고 밥을 적당량 올려 쭉쭉 펴주고
숟가락에 간장을 조금 담아 깔아놓은 밥 위에 서너 군데에 찍는다. 그 위에 묵은지, 진미채 등을 올리고 돌돌 말아서 통으로 들고 뜯어먹었다.
엄마표 도나스(도넛), 호떡, 식혜, 딸기잼, 계란 카스텔라 등, 그 시절 엄마들은 수고로운 일들을 참 많이 하며 사셨다.
추억을 더듬어 엄마가 했던 것처럼 해볼까 하다가 가성비 어쩌고 하는 바람에 그냥 사러 나간다.
40대 주부, 그때의 엄마보다 더 연차가 쌓인 엄마이지만,
쿠팡잇츠와 배달의 민족, 그리고 요기요 등이 해주는 요리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이 먹기 편~한 세상.
왜 그랬을까?
그날 난 왜 불편한 니트 롱원피스를 입었을까?
평소엔 운동화를 신고 다녔으면서 그날 왜 오랜만에 구두를 꺼내 신었을까?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둘째 손을 잡고 집 현관문을 나섰다.
한 두 계단 내려왔나?
구두가 미끄러지면서 스탭이 꼬였는지 내 몸이 계단아래로 휙 던져졌다.
그 찰나가 영화처럼 슬로모션이 되어 기억에 깊이 남아있는데, 홍콩 무술 영화처럼 계단 위로 몸이 던져진 순간 몸을 회전시킨 나는 손잡고 있던 둘째를 품으로 끌어안고 척추뼈를 날카로운 계단에 내다 바쳤다.
계단 끝에 고무패킹이 안된 대리석 날카로운 계단이었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을 때 누운 채로 얼른 품에 안은 둘째를 들어보았다.
'얼굴이라도 긁히면 큰일인데, 오 하나님!', 그 몇 초 사이 오만가지 걱정을 했다.
이 귀염둥이가 까르르 웃고 있었다.
"휴~ 다행이다. 다행이야. " 일어날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지만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니 나를 살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거의 한 층 계단을 날은 셈.
부딪힐 때 분명 빡! 하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는데, 일어설 수 있고 걸을 수 있으니 병원에 가 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타박상이겠거니 하고 새로 산 니트에 구멍 난 것에 더 속이 쓰렸다.
내 등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시간이 없어 그 상태로 약속 장소에 나갔고 2시간가량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있었지만, 앉아 있기 너무 힘든 통증에 이리 들썩 저리 들썩하며 그날 일정을 겨우 마쳤다.
근육통에 먹는 진통제만 몇 번 먹고 말았는데 지속되는 통증 때문에 일주일 뒤 정형외과를 갔다.
엑스레이에 찍힌 내 꼬리뼈는 칼로 베인 듯 뎅강 잘려 확 꺾여 있었다.
의사 선생님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이 정도라면 정말 아팠을 텐데 어떻게 일주일이나 참았냐고 했다. 사무라이가 칼로 벤 듯 아주 싹둑 잘렸다며 사고 당시 왔으면 항문으로 손가락을 넣어 부러진 뼈를 세워 제 위치로 복원시킬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대로 붙어가는 중이라 되돌릴 수도 없다고 했다.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
그날 너를 끌어안지 않았다면
내 몸이 회전하지 않았다면
잡은 손을 놓쳐 네가 함께 계단으로 던져졌다면
아~~ 생각하기도 싫다.
잘했어 잘했어.
다른 뼈도 아니고 평소에 필요 없는 꼬리뼈 부러진 게 얼마나 다행이야.
네가 아니라 내가 다쳐서 얼마나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