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주 Dec 10. 2023

그런 날이 온다면

완치를 향하여

브런치북 <세상에 남기는 나의 흔적> 에필로그




6차 항암치료를 마치고 한 달 뒤 CT, 그리고 또 한 달 뒤 PET, 그 후 1년간 3개월에 한 번씩 추적검사를 했다.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가면 일단 혈액종양검사를 먼저 한다. 난소암의 종양 표지자는 CA-125이다. 보통 CA-199(대장암, 췌장암 종양 표지자) 함께 추적관찰 한다.

그러고 나서 바로 CT를 찍으러 영상의학과에 간다. 접수를 하고, 물을 한 번에 4~500ml나(!) 마시고, 검사를 하면서 조영제를 넣을 수 있게 주사를 잡으러 들어간다. 그러면 항상 같은 레퍼토리가 펼쳐진다.


간호사: (팔을 요리조리 살펴보고)"반대쪽도 볼게요."

나: (다른 팔을 올린다)

간호사: "아...... 혈관이 하나도 없으시네... 주로 어디서 (피를) 뽑으세요?"

나: "그냥 여기저기 찾는 데서... (간호사 선생님들이) 항상 좀 힘들어하시긴 하세요.." (머쓱타드;)


항암치료 횟수가 점차 늘어날수록, 그리고 항암이 아니더라도 매달 입원해 있는 날이 늘어날수록 점점 정맥주사를 맞을 수 있는 혈관은 사라져 갔다. 갈수록 더 자주 병동의 간호사가 마땅한 혈관을 찾지 못해서, 또는 주사를 잡는 데 실패해서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는) 더 숙련된 간호사를 호출해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5차 항암 즈음에 케모포트보다 비교적 간단하다는 팔에 하는 말초삽입형 중심정맥관(PICC)을 권유받았지만, 항암이 한 번밖에 남지 않았었기 때문에 난 그나마 찾는 혈관들로 좀 더 버텨보기로 했었다. 시술하는 게 싫기도 했었고, 항암의 흔적을 내 몸에 남기긴 더 싫었다.


결국 바로 전에 혈액검사할 때 피를 뽑았던 같은 혈관에, 그 구멍 한 1mm 옆에 또 바늘을 찔렀다. 그리고 혈관이 다 너무 얇아서 주사를 꽂은 곳에 별을 마구마구 그려주신다. <**주의**> 이렇게.


내 혈관들 언제 원상 복구되니..?

저번 검진땐 간호사 선생님께 "아, (혈관이) 아직도 없어요? 지금쯤이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주사 안 맞은 지도 한 4개월은 됐는데..."라고 말했더니, 웃으시면서 "혈관이 그렇게 빨리 회복되는 게 아니에요~"하셨다. 아아, 그렇구나... 3개월은, 그리고 6개월도 혈관에겐 빠른 시간이었나 보다. 아니, 망가지는데 항암약물 한두 번이면 되는데, 회복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변화 없음. 새로운 병변 발견되지 않음.>


다행히도 나의 종양표지자 수치는 안정적으로 정상범위 내에서 유지되고 있고, CT상 복부-골반, 흉부 모두에 별 이상이 없다. 말 그대로 몸에 새로운 병변이 발견되지 않았고, 안정적인(stable) 상태다.


그런데 암은 암에서 끝이 아니다. 큰 수술을 하고 나면 각종 합병증이 생기고 그 뒤에 계속해서 이 합병증을 잘 관리해야 한다. 물론 항암약물은 수술 한 몸을 회복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고 수술마다 다르겠지만, 난 크게 두 가지 합병증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림프낭종과 간문맥혈전증.


왼쪽 골반 위 원래 계속 있었던 림프낭종(림프류)이 크기가 줄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건 원래 작았었고 더 작아졌지만, 왼쪽은 그대로 8.7cm 정도 크기로 꿋꿋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교수님이 이게 좀 작아졌으면 좋겠는데 안 작아졌다고 하시며, 수술할 때 림프절을 다 잘라내서 안에 물이 고여서 커졌는데, 또 복막도 다 드러내서 흡수도 안되고 해서 얘가 비닐막처럼 막을 만들어서 그 안에 차있다고 한다. (인체의 신비란...!) 지금 생활에 별문제는 없으니 그냥 지켜볼 거지만 만약 염증이 생기면 림프에 차있는 물을 빼야 한다. 그러니 발열이나 복부통증과 같은 염증반응이 있으면 곧바로 병원에 와야 한단다.


림프낭종이 악성종양에 비해 뭐 별 건가. 재발만 안 됐다면 난 만족이다. 얘가 말썽만 안 일으키고 (염증만 안 생기고) 날 아프게만 하지 않는다면, 난 괜찮다. 이게 자연적으로 없어질 수도 있냐고 교수님께 물어봤더니, '5cm가 넘는 건 안 없어진다고 봐야 한다'라고 하시긴 했지만... 조금씩이라도 점점 작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야구공만 한 이 림프류는 아직도 내 왼쪽 골반 벽에 자리 잡고 있고, cul-de-sac이라는 부분의 fluid collection, 축적된 체액은 항암약물치료 후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서히 육안상 식별이 불가한 영역으로 사라졌다. 나는 항암치료 내내 복수로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이 복수 또한 신기하게도 더 이상 차지 않고 점차 소실되었다. 배 속을 들여다보지는 못해 정확히 언제 제대로, 완전히 소실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간문맥혈전증은 순환기내과를 다니면서 좋아졌다. 프라그민이라는 항응고주사를 4개월 정도 매일 맞다가, CT로 호전된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는 예방 차원에서 항응고제 경구약을 복용했다. 매일 저녁마다 자가주사를 놓다가 '하루에 한 알'이 된 게 정말 기뻤었다.

그리고 그 후 검진에서 내 CT 영상과 피검사 결과를 본 교수님께서 CT 상으로 이미 혈전은 다 없어진 상태고, 피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잘 나왔기 때문에 이제 약을 끊어볼 시기라고 하셨다. (D-dimer 수치가 0.5로 처음으로 정상 범위에 들었다!) 그리고 이제 외래는 올 필요가 없단다. 그렇게 이날부로 순환기내과는 완전히 졸업을 했다. 야호! 행복했다.




교수님께서 잘 지내냐고 물어보셨고, 난 아주 잘 지낸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교수님께서 허허허 웃으시는데 뭔가 내 치료를 담당하시는 의사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기분이 좋았다. 내가 아프지 않아서 교수님을 뿌듯하게 할 수 있는 게 좋았다. 환자 입장에서 의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그런 걸까? 의사들은 환자의 회복만큼이나 뿌듯하고 기분 좋은 게 없다던데.


결과적으로 이제 항암치료가 다 끝나고 1년 2개월이라는 시간이 무탈히 지나갔다. (감사 감사 무한 감사 압도적 감사!!!)

이제는 6개월에 한 번씩 CT를 찍으면 되고, 이 상태로 문제없이 5년이 지난다면, '완치로 간주한다'고 하셨다.

'완치'라는 단어가 교수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암은 완치가 없다는 걸 알지만, 교수님이 '완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완치가 환상이 아닌 실제가 되었다. 완치라는 걸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희망이라는 빛이 아침 햇살 내리쬐듯 내 머릿속 미래를 환히 밝혔다.


5년이다. 그래, 벌써 1년이 지났고, 4년이 남았다. 정확히 말하면 3년 하고 10개월이 남았다. 3년 10개월이 지나면, 그때까지만 잘 버티면, 아프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냥 남들처럼, 암 환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처럼, 이제 31살인 나에게 아직 한참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 수도 있다!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나의 삶이 있다면, 암 환자가 되지 않았던 내가 있다면, 그 평행세계에서의 나와 지금 이 세계의 내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다른 상황에서 다른 경험을 했지만, 결국엔 그 갈래 길이 하나로 모아져 다시 만나 하나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때를 회상해 보면, 환자에게 담당 의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니는 무게는 엄청나다는 걸 실감한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환자에게 의사의 어떤 한마디가 순풍을 일으킬 수도,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전에 병원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거지만, 아픈 환자가 담당 의사에게 의존하는 정도는, 말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그리고 영혼을 제외한 나의 모든 것을 그의 손에 쥐여준 것과 같다.


내 병명인 저등급 난소암은 그래도 10년까지는 잘 지켜봐야 하고, 5년이 지나면 1년에 한 번은 CT를 찍는 게 좋다고 하셨다. 뭐, 1년에 한 번쯤이야. 보통 사람들도 기본 건강검진은 1-2년에 한 번은 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나도 불안해서 1년에 한 번은 검사를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검사 주기가 3개월에서 6개월로 늘어난 것도 처음엔 좀 불안했다. 그 짧다면 짧은 6개월 사이에 혹시라도 내 몸 안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걱정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또 이런 생각에 너무 많은 시간이 쓰이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기 때문에 최대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비정상적인, 평소와 다른 통증이나 현상이 생기지 않는 이상, 내가 내 몸이 건강하다고 느끼는 이상 괜찮은 거라고 그렇게 내 마음과 정신을 다스린다. 이제는 불안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몸이 하고자 하는 말을(증상들을) 귀 기울여 듣는 건 정말 중요하다. Listen to your body!
내 몸은 내 집이다. 내가 성심성의껏 돌보고 지켜주자!


마지막으로 약은 잘 먹고 있냐고 하셔서 매일 잘 먹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침마다 호르몬 약 페마라정(레트로졸)을 복용하고 있다. (원래 유방암 치료제로 쓰이는 약이지만, 난소암 후속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난소암에도 쓰인다.) 또다시 3개월치 처방받은 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병원 앱으로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게 익숙하다. 정말 감사하게도 3차 항암 때부터 난소암 종양표지자(CA-125)는 계속 한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CA-199도 항상 정상 범위 안에서 유지 중이다.


재발 없이 1년이 지났다.

1년 동정기 검진 때 말고는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2021년에는 응급실에 단 한 번도 안 갔다. 2021년에는 아프지 않았다.

일상생활을 누렸고, 여행도 다녔고, 운동도 열심히 했고, 맛있는 것도 많이, 잘 먹었다.

난 더 바랄 게 없다.

이렇게 건강하게 아무 문제 없이 1년이 지나갔다는 거에 너무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아프지 않아서, 주변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난 행복하다.


감격스럽다. 이대로만 1년, 1년, 차근차근 나이 들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든다는 것, 늙는다는 것을 안타까운, 슬픈 일로 받아들이는데, 사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특권'이다. 축하하고 기념할 일이다. 그전에 죽지 않았다는 거니까!


앞으로도 무탈하게 잘 지나가서 2년, 3년, 4년, 5년 졸업할 수 있도록, 5년 졸업을 할 때에는 축하 파티라도 해야겠다.

저번 외래가 끝나고 잠깐 상상해 보았다. 교수님께서 활짝 웃으며 축하한다고, 이제 문제없이 5년이 지났으니 완치나 다름없다고, 너무 축하한다고, 고생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럼 난 정말 감사하다고, 다 교수님이 잘 치료해 주신 덕분이라고, 내 생명의 은인이시라고, 너무너무, 평생 감사드린다고.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까지 화이팅! :)


You have to hold out to see how your life unfolds, because it is most likely beyond what you can imagine. It is not a question of if you will survive this, but what beautiful things await you when you do.
- Chanel Miller

-2021년에

매거진의 이전글 30대 미혼 경력단절 여성 암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