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에 롱패딩을 입고 노트북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대학원 수업에서 대체 무엇을 배우고 있는건지, 이건 어디에 써먹는건지 전혀 감을 못 잡고, 그저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코드를 따라쳤던 그 날. 내가 아주 모른다는 티는 나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옆자리 친구에게 적당한 질문을 하며 그렇게 적당히 시간만 축낸 것 같다는 자괴감이 나를 덮쳤다. 그런데 터벅터벅 걷는 나의 걸음을 두고 한낮의 따스한 볕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사뭇 경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집에 가서 얼른 쉬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한 탓이었겠지.
그러다 순간 코 끝을 스치는 향을 감지했다. 이름 모를 꽃의 향인지, 푸르게 돋아나는 잎의 향인지 그 향의 진원지는 알 수 없지만, 바람을 타고 온 그 향기는 분명 언젠가 맡아본 냄새였다. 잊고 있었던 익숙한 냄새.
내가 처음 뉴질랜드에서 봄 내음을 맡던 때는 걱정이 한가득이라 그저 땅만 보고 걷던 때였었고, 그로부터 몇년 뒤 봄은 당시 내 상황과 달리 너무 찬란하게 빛나 지천에 피어있는 꽃을 보며 나는 속울음을 삼켜야 했었다. 멀리서 찾아든 봄 내음과 함께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오래 전 나의 봄들이 마치 어제일처럼 깨어났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이제는 '겪어본 바' 라는 단서를 달아 내가 나를 위로할 때가 있다.
겪어본 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의 무게와 상관없이 인생은 또 어떤 길을 나에게 내어 줄 것이니, 걱정은 그때가서 해도 된다. 정 걱정이 그렇게나 하고 싶으면 그 걱정만큼 준비를 해보자.
겪어본 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감정들을 어떻게든 해결해내려 아등바등 노력해온 나라는 사람은 지금은 좀 뒤쳐지고 못한다 싶은 것들과도 분명 끈질기게 싸워, 끝내는 그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압도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겪어본 바, 어쨌든 봄은 다시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