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오후 2시를 8분 앞두고 있다. 뉴질랜드의 10월 중순. 이제는 초여름이라 불러도 무방한 쨍한 날씨가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을 옆에 두고 유튜브에서 내가 사랑하는 영화 속 재즈라는 playlist를 켜둔채 글을 쓰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 7개의 글은 더 써서 브런치에 업로드를 해야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무엇이라도 써보려 하고 있다.
- 요즘 나는 내 루틴에 골몰한다. 취업 시장의 한파 속에서 역시 내가 숨을 곳은 내 하루, 내 루틴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매일 영어 원서를 30분 읽기, 한국어 책을 최소 50페이지 읽기, 영화 인턴 노트 1장 받아쓰기, 산책 1시간, 간단한 맨손 근력 운동 1회, 매주 최소 10군데 이상 취업 지원서 쓰기. 원칙은 이 루틴들이 숫자와 함께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숫자, 직관적으로 얼마가 더 부족하고 현재 어디쯤 왔는지를 보여주는 그 바로미터에 요즘 더 매달리고 있는 듯 하다. 언제 취업이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오늘을 부여받은 나는 명확한 숫자들로 이 시간을 치환하여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들은 잘 지켜지고 있는가? 아주 훌륭하게 잘 지켜지고 있다. 불안과 걱정이 올라올 때 도망칠 곳들이 많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놓은 책으로, 따뜻한 볕 아래로, 노트에 끄적이는 영어 속으로 도망치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그곳에서 몰입중인 나를 본다. 이런 선순환으로 루틴은 더 단단해진다. 저번 달 보다 원서 읽는 시간을 늘려볼까? 하는 양적 성장과 요즘 인기있는 소설, 에세이 말고 이제는 고전도 읽어보자는 질적 성장까지 이루고 있다. '그래, 아주 잘 하고 있다.' 이런 칭찬을 습관처럼 나에게 자주 해주고 있다.
- 2013년, 한국에서 1년쯤 유학준비생(백수)로 지내는 동안 영어 공부에만 매진했었다. 그때 노트북 앞에 앉을때마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네이버에서 명언 하나를 찾는 것이었다. 그 명언을 하루 종일 단물이 다 빠졌는데도 계속 씹는 껌처럼 곱씹으며 하루를 보냈다. 나름 인생의 큰 도전을 앞두고 불안과 걱정에 멘탈이 흔들릴 때면 나는 나보다 더 오래 인생을 살았던 누군가의 한마디를 꼭 붙들고 하루를 살아냈다. 나의 사사로운 잡념에는 그걸 죽비처럼 때려줄 한마디가 필요했는데, 내게 네이버 명언은 그런 잡념들을 물리쳐줄만큼 아주 힘이 셌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말을 믿으려했던 나의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주어진 시간을 잘 써서 이 시간을 내 성장의 발판으로 쓰겠다는 나의 의지.
그 시절을 두고 지금을 생각한다. 이제는 네이버 명언을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겪어본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들이 차고 넘친다. 그래도 그 말들이 흐려질 때면 가만히 누워 숨을 고르며 생각한다. '구태여 괴로워 하지 말자'. 하루를 전투적으로 살겠다는 마음보다도 호흡을 길게 가져가고 싶다. 잘 버텨내고 싶고 잘 지나가고 싶다. 여기서 '잘'이라는 것은 나에게 큰 흠집이 나지 않은채, 거뜬한, 너끈한 그런 모양새를 말한다. 쓰고 보니 욕심인 것 같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고 싶다.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 하며, 그렇게 이 계절을 지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