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서 1년 동안 사용할 물품들
남극에 가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받기 전에 해야 할 것은 바로 1년 동안 남극에서 필요한 개인짐을 보내는 것이다. 출국 약 2달 전까지 연구소로 우체국 박스 5호 기준으로 3개까지 보낼 수 있다. 비행기로 보내는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의 쇄빙선 아라온호가 인천에 정박할 때 연구부품 및 장비와 함께 우리 개인짐도 같이 실어서 보내주는 것이다.
우리가 남극으로 출국할 때는 가져갈 수 있는 짐이 너무 제한적이다. 한국 뉴질랜드 공군기를 통한 입남극의 긴 여정에 제한되는 물품이 있을뿐더러, 한 사람당 23 kg의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만 가지고 탑승할 수 있다. 게다가 23 kg 중 약 10 kg는 입남극시 필수로 입어야 하는 보급 방한복, 등산화 등이기 때문에 개인물품은 배낭을 합쳐 10 kg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물품을 최대한 배로 많이 보내놔야 한다. 우리나라의 쇄빙선으로 보내는 것이고, 연구물품을 보낼 때 겸사겸사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첫째로 떠오른 건 책이었다. 난 원서를 읽는 걸 좋아한다. 장보고 과학기지의 식당에는 몇 백 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이 있지만 원서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박스의 절반은 책으로 채웠다. 그 밖에 1년 동안 먹고 사용할 개인 영양제, 로션, 선크림, 약, 옷가지, 충전기 여분, 안경 여분, 선글라스 여분, 전자제품 케이스 여분, 건전지, 수건, 텀블러, 실내용 슬리퍼, 멀티탭, 사진, 안대, 보드게임, 비누각, 친환경 비누, 개인 탁구채 등을 챙겼다. 쇄빙선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무게 제한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부피가 문제였다. 몇 개 안 챙긴 것 같았는데 벌써 박스 3개가 꽉 찼다. 부피를 맞추느라 꽤 많은 시간을 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수건, 텀블러, 애인과의 사진, 안대, 탁구채,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이다. 일단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은 남극에서 여름에 좋다. 백야 때 야외활동 시에는 선글라스는 필수다. 햇빛이 너무 강렬한 데다가 눈과 얼음에 반사까지 되기 때문에 선글라스 없이 돌아다니면 눈에 좋지 않다. 실내활동 시에는 햇빛을 맞을 일이 많이 없지만, 통신실에서 야간당직 근무를 할 때는 사방에 창이 있고 해가 지는 대신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이 있으면 당직서는 데 꽤 수월하다. 물론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이 안경을 끼면 휴대폰을 좀 더 안심하고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비슷한 이유로 안대와 여분도 필수다. 백야 때 커튼을 3중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빛이 밤새 들어오기 때문에 안대가 있어야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탁구채도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남극에 오기 전에는 따로 많이 치지는 못했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취미로 꽤 많이 쳤다. 남극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스포츠가 많이 없기 때문에 탁구를 많이 친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때는 탁구 대회도 열린다. 오늘도 휴무라 기상대원님과 2시간 정도 빡세게 치고 왔다. 달리기도 좋아해서 런닝화도 챙겨 왔는데 정말 잘 챙겨 온 것 같다. 풀코스 3시간 반 이내를 목표로 열심히 뛰고 있다.
굳이 안 보내도 됐을 물건들은 보드게임인 것 같다. 난 카탄과 뱅, 장기를 보냈는데 다 장보고 기지에 구비되어 있었다… 더 가져왔으면 하는 건 (차마 못 가져온) 전공 교과서와 기타 책들, 그리고 운동복 여분, 동료들의 생일 선물이다. 이미 남극에 와보신 분들은 동료들에게 선물을 준비해 왔는데, 난 그렇지 못해 너무 아쉽다. 그리고 여기서는 빨래를 자주 못한다. 운동복이 땀에 젖을 때마다 빨래를 할 수는 없기에 운동복 여분을 더 가져왔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난 박스당 17킬로 정도로 3박스를 연구소로 보냈다. 방문택배로 할 수도 있었지만 좀 빠듯하게 보내게 되어 내가 직접 근처 우체국까지 가져가서 보냈다. 총무님께 패킹리스트(박스 내용물, 부피, 크기, 무게, 내 연락처 등)까지 엑셀파일로 보내드리면 끝난다. 9월 17일까지 연구소로 보내면 총무님이 검토하신다. 입남극이 2025년 11월 7일이었지만 물건을 받은 건 아라온 1항차, 12월 초중순 정도였다. 즉, 이 한 달 동안 사용할 물건들은 출국 시 직접 가지고 가야 한다. 남극에서 제일 기분 좋은 날 중 하나가 이 개인짐을 받는 날이지 않나 싶다. 그때쯤 우리는 서로 많이 친해져서 박스를 열어보며 놀리곤 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온 만큼 보낸 물건도 가지각색이었다. 색소폰을 보내 크리스마스 때 연주회를 한 대원도 있었고 전공책을 잔뜩 보낸 대원과 편한 이불과 베개를 보낸 대원도 있었다.